어느 반역자의 재판
  
  
  
  1945년 7월 23일 파리특별고등법원에서는 독일의 점령기간 중 親獨 비시(Vichy) 정권의 국가 주석이었던 앙리 필립 페탱(1856∼1951) 元帥(원수)에 대한 재판이 개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베르덩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전쟁 영웅이었고, 한때는 「국가의 구원자」이자「國父(국부)」로까지 추앙을 받았던 그가 이제 역사의 죄인이 되어 법정에 선 것이다.
  
  -페탱의 항변-
  
  페탱이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은 독일군의 電擊戰(전격전)으로 프랑스군이 붕괴되어 가고 있던 1940년 5월 부수상에 임명되면서부터였다. 같은해 6월16일 그는 수상이 되었고, 7월10일에는 개정 헌법에 의해 비시 정권의 국가주석 자리에 올랐다. 그 자리는 치욕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국토를 침략자에게 할양한 대가로 얻은 자리였고, 국가의 인적·물적 자원들을 침략자에게 바침으로써 유지할 수 있는 자리였다.
  
  84세의 페탱이 老軀(노구)를 이끌고 그런 汚辱(오욕)의 자리로 나간 것은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드골의 회고처럼 페탱이 단순한 입신출세자로 만족하기엔 너무나도 야심가였고, 고독 속에서 남을 지배하려는 情念(정념)을 길러왔기 때문이었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당시 페탱을 비롯한 프랑스군 상층부는 프랑스가 독일의 침략을 받아 「국가 자체가 소멸해 버린」 폴란드의 前轍(전철)을 밟게 되거나, 패전의 와중에서 민중들이 봉기하여 파리 코뮨을 결성하는 바람에 피비린내 나는 내란까지 겪어야 했던 普佛(보불)전쟁 때의 악몽을 되풀이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 사로잡혀 있었다. 페탱은 그러한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했다고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그 길은 조국과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의 길이었다.
  
  대외적으로 비시 정권이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으로 기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당연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비시 정권은 내부적으로도 「민주공화정」이라는 프랑스의 政體(정체)를 그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비시 정권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은 제3공화국의 체제 모순 때문이라면서 소위 「국민 혁명」을 추진했다. 의회민주주의가 폐기되었고, 국가주석 1人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개헌이 이루어졌다. 「자유」·「평등」·「박애」라고 하는 대혁명 이래의 국가이념은 「노동」·「가족」·「국가」라는 구호로 대치되었다. 독일의 돌격대(SA)나 이탈리아의 「검은 셔츠단 」처럼 「밀리스」(민병대)라고 하는 極右(극우) 무력집단이 등장했다. 프랑스는 파시스트 국가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이상과 같은 페탱의 전권 장악과 정체의 변경은 합법성의 外皮(외피) 하에 이루어졌다.
  페탱이 수상을 거쳐 국가주석이 된 것도, 제3공화국 헌정 질서에 종지부를 찍은 개헌도 모두 의회의 인준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미국·소련·바티칸 등 국제 사회도 비시 정부를 합법적인 프랑스 정부로 인정했다.
  
  게다가 국민들의 지지도 뒷받침되었다. 물론 독일 점령군과 비시 정권에 맞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인 애국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다수의 평범한 프랑스 국민들은 상당 기간 동안 페탱을 여전히 「베르덩의 영웅」으로 기억하면서, 그를 패전으로 인한 전면적 국가해체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구원자」이자, 국가 재건의 구심점이 되는 「국부」로 떠받들었다.
  
  그러니 전쟁이 끝나 附逆者(부역자) 재판에 회부된 페탱이 『의회 대표들을 통해 1940년 7월10일 내게 전권을 준 것은 바로 프랑스 국민이다. 나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승계했다』고 항변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에 대해 드골은 『휴전에 동의하여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프랑스 국민을 노예 상태로 전락시킨 페탱 정권은 국가의 이익을 배반한 불법적인 정권이며, 제3공화국의 정통성·합법성은 독일과의 항전을 계속함으로써 국가의 이익을 지켜낸 「자유 프랑스」에게로 이어진다』고 반박했다.
  
  1945년 8월15일 페탱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드골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된 페탱은 1951년 7월23일 유배지인 브레타뉴 해안의 뒤(d'Yeu)섬에서 95세를 일기로 榮辱(영욕)이 교차하는 삶을 마감했다.
  
  -국가지도자는 나라의 정체성을 지켜야-
  
  페탱은 단순히 나치독일에 대한 항복문서에 조인하거나, 영토의 일부를 할양하거나,침략자 나치에게 협력했기 때문에 처단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행위들도 페탱의 罪行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지만, 戰後 부역자 재판에서 가장 엄중하게 책임을 추궁당한 부분은 그가 패전의 와중에서 비시체제를 출범시키면서 프랑스공화국의 민주질서와 국가의 正體性을 파괴했다는 점이었다.
  
  페탱의 사례는 우리에게 국가 지도자의 행위의 정당성은 그 행위의 동기 못지 않게 그 결과에 의해서, 그리고 형식적인 합법성이나 국민들의 일시적 지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행위의 실질적 내용에 의해 담보된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페탱은 외형상 합법적인 통치자였고, 국민들로부터 일정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수반으로 있었던 비시 정권의 통치 행태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나라의 正體性을 파괴하고, 국가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과 같은 국가 이익을 해치며, 국민의 생명·재산·기본적 인권을 파괴하는 것이었기에 결국 사법적 단죄와 역사의 심판을 받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