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族共助?>
  
   -'현재 조선반도 상황은 ‘北과 南 조선민족 對 미국 간의 대결’<1월 1일 노동신문 등 3개 신문 신년 공동사설>
  - “미국이 조선의 통일을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민족은 벌써 오래 전에 조국통일을 실현했을 것 … .北南 공동선언의 기본정신인 자주통일 사상은 온 민족이 높이 들고 나가야 할 조국통일의 기치”<1월2일, 조선중앙방송>
  - '現 시기 조선반도의 대결구도는 조선민족 對 미국…. 北과 南, 해외 전체 조선민족은 미제의 전쟁책동을 경각심을 갖고 대해야 하며,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단호히 반격을 가해야 한다”<1월3일, 평양방송>
  -“민족의 사활과 운명이 걸린 조국통일 문제를 외세의 간섭 없이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1월3일, 노동신문>
  - '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이룩하려는 북과 남 해외 동포들의 노력은 더욱 뜨겁고 강렬할 것이다.' <조선중앙방송, 1월6일>
  
  작년 10월 북한의 우라늄 核개발 파문이 터진 후 미국의 對北압박에 대해 ‘北과 南 조선민족 對 미국 간의 대결’구도라는 카드를 빼들었던 북한은 새해 접어들면서도 연일 '民族共助'를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심지어 북한은 '북한의 무장력 덕분에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만큼, 한국도 북한의 '先軍정치'의 덕을 입고 있다'는 식의 궤변까지 늘어놓았었다. 북한은 의정부 女中生 사고로 한국에서 연일 촛불시위가 계속되던 작년 연말, 평양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美軍을 규탄하고, 사망 여중생들을 추도(?)하는 집회를 대대적으로 열어 '민족의 동질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긴 이미 10년 前 YS가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도 민족보다 소중할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民族共助論'의 元祖는 북한 당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 정부인지도 모르겠다.
  '民族共助論' 라는 '트로이의 木馬' 속에 내포된 안보상의 위험 요소에 대해서는 2000년 6·15공동선언이 나온 직후부터 月刊朝鮮 등에서 이미 여러 차례 경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再論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다만 여기서는 한가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볼까 한다. 그것은 ' '民族共助'를 논하기에 앞서 한반도에 과연 '(근대적 의미에서의) 하나의 民族'이 존재하는가'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펄쩍 뛰며 이렇게 항의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이념적으로 南과 北으로 갈라져 있지만, 南과 北의 동포들은 다 같은 檀君의 자손이며, 한 핏줄, 한 겨레가 아니냐'고.
  물론 그렇다. 북녘땅에는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과 우리는 언젠가는 하나된 조국의 하늘 아래서 함께 살아야 할 '동포'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항의는 언어, 전통, 공통의 문화유산, 종교, 관습 등과 같은 객관적 기준을 민족의 기초로서 강조하면서 민족을 '국가에 先行하며 공통의 역사적 가치와 사회적 유대에 기초를 둔 實在'라고 배워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민족개념을 '객관주의적 민족이론' 또는 '문화민족(Kulturnation)'이라고 한다.
  이처럼 '人種 공동체의 영속성'에 바탕을 두고 '민족'의 개념을 파악하는 사람들은 '민족주의' 역시 '종족, 조상, 언어, 영토라는 原初的 紐帶(유대)에 기초'해 있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原初論).
  
  그런데 '민족'을 '국가에 先行'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근대화와 시민사회의 産物'로 이해하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민족은 '민족공동체에 기꺼이 자신을 귀속시키고자 하는 민족 구성원의 주관적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를 '주관주의적 민족이론' 또는 '국가민족(Staatsnation)이론'이라고 한다.
  이 경우 '민족공동체에 기꺼이 자신을 귀속시키고자 하는 민족 구성원의 주관적 의지'란 자신이 속한 血緣공동체나 地緣공동체, 혹은 자신이 모시는 主君에 대한 충성심과는 구별된다. 아득한 古代부터 있었던 그러한 감정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血緣공동체나 地緣공동체, 혹은 봉건적 主從관계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혈통·언어·풍습·공동의 역사 등은 '민족'형성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민족'을 형성하는 전부는 아니다. 하나의 '민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血緣공동체나 地緣공동체,봉건적 主從관계,계급간 利害관계를 뛰어 넘어 민족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시민혁명을 거친 西歐와 미국에서 '민족'의 형성을 가능케 한 '그 무엇인가'는 바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이었다.
  예컨대 프랑스의 경우 절대 王權하에서도 중앙정부에 고개 숙이기를 한사코 거부하던 브레타뉴 지방의 켈트人들이나, 루이14세 시절 프랑스에 倂呑(병탄)된 알자스-로렌 지방의 게르만人들까지도 '프랑스人'으로 한데 어우러진 것은 프랑스 大혁명 이후였다.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 大혁명의 理想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민족'이 형성되었고, 프랑스 민족은 '동등한 시민의 結社로 구성된 애국적 공동체'인 프랑스공화국을 형성했다. 즉 '민족=국가'인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 개념을 이렇게 이해할 때, '민족'은 근대화와 시민혁명의 産物인 것이다 (도구론).
  물론 이 경우 '민족'이란 객관주의적 민족이론의 관점에서 보는 '문화민족'이 아니라, 주관주의적 민족이론의 관점에서 보는 '국가민족'이다. 그런데 '국가민족'을 줄이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國民'이 된다.
  여기서 '국가=민족=국민'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영어 등에서 'Nation'이라고 하면 국가, 민족, 국민을 모두 의미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종족·조상·언어·영토 등에 바탕을 둔 민족개념은 後進性의 소산>
  
  나폴레옹의 유럽 제패와 함께 프랑스 혁명의 産物인 민족주의는 온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귤이 淮水(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민족주의는 라인강을 건너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내용물은 빠져버린 채 굴절되고 말았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당시 독일은 수십개의 봉건적 領邦(영방)국가로 분열되어 있었고, 아직 시민계급은 형성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 아래서는 프랑스에서처럼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걸고 독일人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독일人들도 '민족'의 기치 아래 하나로 묶어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독일人들에게 제시된 것이 바로 종족·혈연·역사·언어 등과 같은 '원초적'인 요소들에 바탕을 두는 민족개념이었다. '아리안族의 우월성에 대한 神話'와 극단적인 人種主義를 내용으로 하는 나치즘의 씨앗은 이미 이때 뿌려진 셈이다.
  
  사정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압제 아래 있던 中·東部 유럽이나 발칸반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外勢 혹은 專制군주체제가 감시와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던 이 지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정치공동체'를 지향하는 '주관주의적'민족이론은 발을 붙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中·東部 유럽, 발칸반도, 러시아에서도 종족·혈연·역사·언어 등과 같은 '원초적'인 요소들에 호소하는 '객관주의적' 민족이론이 主流를 형성하게 되었다. 19세기말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主流를 형성한 것도 '객관주의적' 민족개념이었고, 그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민족'이란 개념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빠지고, 종족·혈연·역사·언어 등과 같은 '원초적'인 요소들을 되풀이 강조하면서, '과거의 영광된 민족사'를 反芻(반추)하는 객관주의적 민족개념(문화민족개념/원초론)은 분단을 극복하거나 外勢에 항거하는 抵抗민족주의로서는 일정한 의미가 있지만, 그 害惡 또한 작지 않았다.
  객관주의적 민족개념을 바탕으로 분단을 극복하거나 外勢를 몰아낸 후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 그들은 예외없이 國粹主義·軍國主義로 흘러 안으로는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밖으로는 침략전쟁으로 내달렸다. 히틀러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가 그 좋은 例이다.
  심지어 우리가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 제대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가련한 弱小國으로 기억하고 있는 폴란드조차도 제1차세계대전 후 '大폴란드주의'를 내걸고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등의 영토를 잠식하고, 주변국들을 위협했었다. 같은 시기 헝가리·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불가리아 같은 나라들은 저마다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자국內 異민족들을 차별하고 이웃 나라들과 분쟁을 일삼음으로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민족개념의 소급적용>
  
  민족이란 것이 근대화와 시민혁명의 産物이라면 우리 역사상 '민족'에 대한 관념도 再考되어야 한다.
  우선 古朝鮮을 중국 북부,한반도를 지배했던 大제국으로 인식하거나, 隋·唐의 침략에 맞선 고구려인들의 항쟁을 민족주의적 잣대로 바라보는 생각, 唐과 손잡고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행위를 '反민족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인식 등은 냉정하게 생각하면 史實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古朝鮮系의 청동기 유물들이 나오는 범위는 같은 문화를 가진 古代人들의 생활범위를 의미하는 것이지, '古朝鮮'이라는 영역 국가의 통치범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隋·唐에 맞선 고구려인들의 항쟁은 고구려·백제의 침략에 맞선 신라인들의 항쟁, 고구려 혹은 신라의 침략에 대한 백제인들이 항쟁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隋 煬帝(수 양제)나 唐 太宗(당 태종)과의 전쟁에 나서는 고구려 장졸 등 가운데 그 싸움을 '漢民族 對 韓民族'의 싸움으로 인식한 사람이 과연 하나라도 있었을까? 그들이 漢民族의 침략으로부터 백제와 신라를 지켜내는 '민족의 방파제'라는 의식을 가진다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그들의 의식은 기껏해야 자신이 족한 部族, 잘해야 고구려라는 線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신라가 외세인 唐을 끌어들여 同族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反민족적' 죄악을 저질렀다고? 건국신화와 유물 등을 통해 볼 때 신라는 백제·고구려와는 계통을 달리하는 족속이었던 것이 거의 분명하다. 언어나 풍속상의 이질성도 상당했다. 일본서기에는 고구려나 신라에서 보내온 國書의 내용을 일본 조정의 백제계 관리가 해독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나온다던가?
  삼국시대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아우르는 공통의 민족의식도, 공통의 문화도 없었으며, 그들은 한반도의 覇權(패권)을 놓고 서로 경쟁하던 사이에 불과했다. 그러한 경쟁에 유리하다면 그들은 상대가 중국이건,북방 오랑캐건, 倭人이건 끌어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唐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신라의 행위가 규탄받아야 한다면,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北魏(북위)를 끌어들였던 고구려 장수왕이나,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北魏에 아부했던 백제 개로왕, 광개토대왕에게 맞서기 위해 倭兵들을 끌어들였던 백제 아신왕, 羅唐연합군의 침공을 받자 倭軍들을 불러들였던 백제 부흥군의 행위도 비판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보는 견해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마치 오늘날과 같은 민족 개념이 삼국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고, 삼국이 그런 민족 의식을 共有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는 민족개념을 '소급적용'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땅에 제대로 된 '민족'이 존재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反민족적'운운하는 것이 이치에 닿는 일인가? 그것은 역사에 대한 無知가 아니면, 오늘의 현실을 1300년 전의 역사에 빗대보려는 정치적 프로파건다이다.
  
  하여튼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체(Nationality·민족을 구성하는 객관적 요소에서 일정한 동질성을 확보한 집단. 장기간의 역사적 경험을 共有함으로써 언어와 문화, 사회역사적 의미에서의 혈연 등에서 동질화된, 그러나 근대 민족에서처럼 모든 민족 구성원이 능동적인 민족의식을 갖고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는 아직 결여된 제한적 동질 집단)'형성을 향해 나가는 커다란 진전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는 우리 겨레의 한 갈래인 고구려의 遺民(유민)들과 말갈족들이 발해를 세웠다. 이 시대를 일컬어 '南北國 시대'라는 말이 흔히 쓰이고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정확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그러한 표현은 마치 하나였던 나라가 南北으로 분단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중국이나 일본의 南北朝 시대처럼). 하지만 신라와 발해는 처음부터 하나의 나라였던 적도 없었고, 하나의 나라를 지향한 적도 없었다. 그저 기회가 닿으면 교류를 하다가도 수틀리면 으르렁거리는 이웃 나라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후의 역사는 아쉽지만 고구려-발해를 민족체 형성의 큰 흐름에서 탈락시키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고구려-발해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우리의 역사의 소중한 자산으로 수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神話化'하는 것은 역사를 직시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三韓一統'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본래 하나였다가 셋으로 흩어진 나라를 다시 통일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를 아울어 신라의 통치 질서 아래로 통합했다는 의미가 강한 것이었다.
  
  신라말 중앙권력이 해체되면서 西南해안의 호족들이 백제를, 북방계 호족들이 고구려를 부흥한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은 신라의 통일이 갖는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삼국遺民 의식은 고려 중기까지도 남아있어, 무신정권 시대의 民亂 가운데는 신라나 고구려의 부흥을 내 건 경우도 있었다.
  몽골의 침략은 당시 고려인들에게 '我'와 '非我'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면서 민족체의 동질성을 한층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아직 '민족'의 형성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사회발전은 민족체의 동질성을 계속 강화했지만, 이 역시 근대적 민족의 형성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나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생각해 보자.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보면 忠君愛民의 정신과 倭敵에 대한 적대감은 보여도 임진왜란을 '조선민족 對 일본민족'의 대결로 보는 인식은 눈에 띄지 않는다.
  두 차례의 胡亂을 겪은 후 조선에서는 '明이 멸망한 후 中華의 정신적 법통은 조선에게로 이어졌다'는 '朝鮮中華' 사상이 싹텄다. 이는 조선인들의 자긍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중화 사상이 양반지배층과 민중들을 아우르는 '민족'의식의 발로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민족의식이 발생하고 성장한 것은 舊韓末 개화사상과 애국계몽운동을 거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근대에 대한 인식이 불철저하고, 日帝의 침략에 직면해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의 민족의식은 자연 혈연과 역사, 문화의 공통성에 호소하면서 日帝에 대한 저항이데롤로기를 제공해 주는 객관주의적 민족개념, 원초론적 민족개념, 문화민족 개념으로 흘렀다. 여기에 더해 3·1운동 이후 여러 독립운동진영이 독립국가의 모델로 민주공화정을 지향하면서 민족에 대한 인식은 보다 근대성을 띄게 되었다.
  
  <두 개의 민족, 두 개의 정치체제>
  
  光復 후에도 南과 北의 민족주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주관주의적 민족개념, 도구론적 민족개념, 국가민족 개념보다는, 혈연·역사·문화적 공통성에 호소하는 객관주의적 민족개념, 원초론적 민족개념, 문화민족 개념에 기울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해 온 대한민국에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용물로 하는 주관주의적 민족개념보다는 객관주의적 민족개념이 主流를 형성했던 것은 日帝시대 저항적 민족주의의 遺産이자, 근대화와 국가안보가 강조되던 개발독재 시대의 産物일 것이다.
  1980년대 초, 육군본부에서 桓國이 유라시아를 지배했고, 단군조선이 동아시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으며, 삼국은 중국본토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내용의 國粹主義的 在野 史學을 그대로 수용한 역사책을 펴내고 보급했던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 대신 원초론적 민족주의로 민족공동체의 내용을 채워보려는 조야한 시도였다면 지나친 말일까?
  
  북한은 본래 '민족을 근대 부르조아의 産物'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주관주의적 민족개념에 접근해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후반 '주체사상'을 내걸면서 북한의 민족에 대한 인식은 원초론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자신들을 고구려와, 대한민국을 신라와 等置(등치)시키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북한이 소련·동구권 붕괴 이후 새삼 단군을 강조하고, '조선민족제일주의'를 강조하고 나선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19세기말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비전을 제시할 수 없었던 환경 속에서 독일이나 동구 국가들이 '객관주의적 민족개념'으로 흘렀던 것처럼, 사회주의 지상낙원 건설의 비전도, 자유와 민주주의도, 물질적 번영도 약속할 수 없게 된 북한이 '원초적 민족주의'를 자신의 탈출구로 삼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스스로도 '金日成 민족'이라는 용어를 통해 그들이 말하는 '조선민족'이란 '김일성 주체사상을 삶의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는 정치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임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 그리고 그들은 지금 '民族共助'라는 呪術(주술)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까지도 현혹하려 들고 있다.
  
   '민족공동체에 기꺼이 자신을 귀속시키고자 하는 구성원의 주관적 의지'에 의해 민족이 형성된다고 보는 주관주의적 민족개념에 의하면, 南과 北은 日帝시대까지는 하나의 '민족체'로서의 경험을 共有해 왔지만, 光復 후 서로 다른 정치체제가 들어서면서 한쪽에서는 '자유민주주의적 민족'이, 다른 한쪽에서는 '주체사상적 민족'으로 갈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금 南과 北에는 '하나의 민족, 두 개의 정치체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민족, 두 개의 정치체제'가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南과 北은 지금껏 '민족'의 내용물을 '자유'와 '민주주의'로 채울 것이냐, '봉건적 억압'과 '전체주의'로 채울 것이냐를 놓고 경쟁해 왔고, 지금도 경쟁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민족'의 내용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냐 하는 고민보다는, 그저 '무조건 얼싸안고 하나가 되자'는 정서가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된 민족, 하나된 조국'에서 자유도,인권도,민주주의도,경제적 번영도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민족'을 소리높여 외치는 자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민족'이란 '김일성 민족(봉건적 전제과 야만과 빈곤의 공동체)'이라는 개념도 수용하는 것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다같은 '南(유고)슬라브族'이니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원초적 민족개념에 바탕을 두고 자발적 의지에 의해 하나의 국가를 형성했던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인,마케도니아인,몬테니그로인들이 결국은 '유고슬라비아 민족'을 형성하는데 실패하고, 流血 내전 끝에 갈갈이 찢기워진 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만일 南슬라브 諸族들이 '핏줄'이라는 기치 대신 '자유'와 '민주주의', 민족간 평등'의 기치 아래 뭉쳤다면, 아마 유고내전이라는 비극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반면에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이후에도 분리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독일의 諸州들로 하여금 독일연방공화국의 기치 아래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게 만들고, 결국은 ''사회주의적 독일민족'이 따로 존재한다'고 公言하던 東獨마저 흡수하여 명실상부한 '독일민족'의 완성을 보게 한 바탕에는 西獨의 자유와 민주주의,경제적 번영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와 독일, 이 가운데 우리는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