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도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이없는 판결이 나왔다. 대통령을 욕했다고 처벌받는 세상이라니.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대학 내 부착했던 20대에게 벌금형이 선고됐다. 대학 건물에 대자보를 붙인 것이 '건조물 무단 침입'이라는 것이다

대전지법 천안지원 형사3단독 홍성욱 판사는 23일 건조물 침입 혐의로 기소된 김 모(25) 씨에게 벌금 50만 원을 선고했다. 홍 판사는 “공소 사실이 모두 인정된다”며 선고 이유를 밝혔다.

김 씨는 지난해 11월24일 충남 천안시 단국대 천안캠퍼스 자연과학대학 건물 내부 등 4곳에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인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 20일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김 씨를 벌금 100만 원에 약식 기소했다. 김 씨는 이에 불복,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해당 대자보는 패러디 형식으로 문재인 정부의 친중 노선을 비판하고 홍콩 자유화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얼굴이 인쇄된 대자보에는 “나(시진핑)의 충견 문재앙이 공수처, 연동형비례대표제를 통과시켜 완벽한 중국 식민지가 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칠 것”이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김 씨는 과거 학생운동 단체의 이름을 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신 전대협)’에서 활동해왔다. 이 단체는 주로 김정은이 마치 남한에 지령을 내리는 식의 대자보 등 풍자와 해학적 방법으로 문 정권을 비판해왔다.

대학에 대자보를 붙였다고 수사나 기소를 하는 건, 군사 정권 시절에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경찰과 검찰은 정부 비판 대자보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모욕죄 등을 적용할 수 없게 되자, 엉뚱하게 ‘건조물 침입’ 혐의를 들고 나왔다.

‘건조물 침입’은 집이나 건물, 선박, 항공기 등에 무단 침입하거나 퇴거 요구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경우 적용되는데, 황당한 것은 이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없다는 점이다. 5월20일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한 진모 단국대 학생팀 과장은 “‘업무협조’차 (대자보가 붙은 사실을) 경찰에 알렸을 뿐이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본 적도 없다.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이 문제가 과연 재판까지 가야 할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진 과장은 이날 자신이 피해자로 돼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고 했다.

대자보가 붙여졌던 이 대학 건물은 사실상 외부인에게 24시간 개방돼 있다. 학생들 외에도 동네 주민, 영업사원, 배달원 등 다양한 사람이 제약 없이 드나든다. 오픈된  건물에 들어가는 것은 원칙적으로 무단 침입이 아니다. 대자보를 붙였다고 ‘건조물 침입죄’로 처벌한다면 앞으로 영업사원이 광고물을 붙여도 처벌해야 할 것이다.

김 씨는 대자보를 붙이기만 했을 뿐 대학에 아무 피해를 준 적이 없다. 대학 관계자도 법정에서 “처벌을 원치 않는다” “피해 본 게 없다”고 증언했다. 그런데도 경찰과 검찰이 억지 혐의를 붙여 기소했다. 애당초 무단침입은 핑계일 뿐, 정권 비위를 맞추기 위한 기소다. 그런데 여기에 법원 판사까지 장단을 맞췄다. 경찰, 검찰, 법원이 다 함께 ‘앞으로 정권 비판하면 감옥 갈 각오를 해야 할 거야’하는 대국민 협박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김 씨 측 변호인인 이동찬 변호사도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현 정권 주축인 운동권 출신들이 과거 대자보를 붙인 것은 표현의 자유, 민주화 운동이고 김 씨의 대자보는 건조물 침입죄인지 묻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이 2017년 대선 후보 시절 방송에 출연해 “국민은 얼마든지 권력자를 비판할 자유가 있다”고 한 발언 내용도 참고 자료로 첨부했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헌법학)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헌법상 국민의 핵심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판결”이라며 “수많은 게시물 중 유독 김 씨가 붙인 대통령 비판 대자보만 콕 집어 처벌한 점에서 헌법상 평등권의 일부인 ‘형평의 원리’도 심각히 위배한 것”이라고 말했다. 적어도 이 사건을 통해 본 대한민국은 80년대 이전으로 돌아간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