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한 한 가난한 조각가의 방에는 달력이 걸려 있었습니다. 거기엔 이런 낙서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범인(凡人)에겐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천재에겐 감사를」.
  
  저는 死後에 유명해진 이 불운(不運)했던 예술가의 입장에 서서 이 글을 해석 해보려고 했습니다. 바보는 순수한 영혼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재의 위대성을 알아줍니다. 凡人은 보통수준의 안목밖에 없으면서 천재를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천재의 위대성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깎아 내리려고만 합니다. 천재의 입장에선 그런 사람들은 바보보다 못한 위인입니다. 바보와 천재의 공통점은 마음이 순수하다는 점입니다. 天才의 입장에선, 凡人의 수준밖에 안되면서 아는 체하고 꼬인 사람들은 바보보다도 못한 이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凡人이란, 건강한 정신을 가진 民衆이 아니라 일부 평론가, 교수, 기자처럼 凡人의 능력밖에 없으면서 과분한 직권을 갖고 펜대를 마구 휘둘러 천재들을 괴롭히기만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조각가가 「천재에겐 감사를」이라고 절규했을 때 그는 바보들이 아닌 이 凡人 그룹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凡人들이 天才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모차르트, 에디슨, 파스퇴르, 셰익스피어, 김소월(金素月), 윤용하(尹龍河), 이중섭(李仲燮)... 이런 천재들의 발명과 작품을 우리 보통 사람들은 공짜로 이용하고 즐기고 있습니다. 많은 천재들이 凡人들의 냉대와 無知로 해서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불우한 삶을 살다간 다음에 後代에 인지(人智)가 발달한 사람들에 의해서 비로소 제대로 평가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凡人들은 천재들에게 감사뿐 아니라 죄송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차범근(車範根) 축구감독은 한국의 대표적인 천재입니다. 詩記?언어의 천재이고 영웅은 행동의 천재라면 차범근은 체력과 감각의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세리와 박찬호 선수가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기 거의 한 세대 이전에 그는 서독 프로축구 리그에서 스타가 되었습니다. 많은 국민들은 그의 천재성으로 해서 4반 세기 동안 큰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천재에겐 감사를」이란 말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런 車範根 감독이 지난 프랑스 월드컵 대회 때 네델란드 팀에 5對 0으로 지는 게임을 지휘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국민들은 패배, 그 자체보다는 한국인의 자랑인 「악착 같은 투지(鬪志)」가 보이지 않는 데 실망하고 분노했습니다. 이런 여론을 의식한 축구협회는 벨기에 팀과의 한 게임을 남긴 車감독을 해임하고 車範根씨는 죄인이나 된 것처럼 기가 죽어 김포공항으로 들어왔습니다. 16强 진출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이런 전격해임이 여론을 잠재운다는 정치적 목표이외에 무슨 실효가 있는 것인가 하는 반대 여론도 만만찮았습니다. 실제로 방송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車감독의 그런 해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다수였습니다. 풀이 죽어 귀국한 車範根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는 시민도 많았습니다.
  
  지중해 문명권의 패자(覇者)를 결정한 카르타고-로마의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패장(敗將)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로마는 敗將에게 더 성대한 개선식을 베풀어주고 위로했습니다. 단기적으론 敗將을 사형에 처하면 용감하게 싸우도록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장기적으로는 로마式의 관용이 효과적이었습니다. 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지휘관은 눈앞의 현상만 보고 짧은 계산만 하기 때문에 전투엔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 전략이 필요한 전쟁엔 이길 수가 없는 법입니다.
  
  車範根이란 천재로 해서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국민들이 즐거웠다면 벨기에戰 한 게임은 그에게 선물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감독과 선수들은 국민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졌을 것이고 패배의 교훈에 대해서 더 진지한 되새김질을 했을 것입니다. 「백번 잘하고도 한번 실수하면 도덕적으로 몰아서 죽이는 분위기」가 아니라 「敗將을 따듯하게 감싸주는 국민」의 모습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車範根이란 천재는, 승패의 의미는 없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품의가 걸린 그 한 게임을 소유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축구협회와 많은 언론은 그를 버렸습니다.
  
  車範根-오은미(吳銀美) 부부가 느꼈을 섭섭한 감정은 지난 8월호 月刊朝鮮의「격정토로 8시간」에 실려있는 그대로 입니다. 車範根 부부의 발언은 두 사람이 「축구계의 기득권층」으로 보고있는 많은 스포츠 기자들과 축구협회 사람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축구협회와 스포츠 기자들이 쏟아낸 공격들은 선동적이었고 과장이 많았으며 언론의 원칙을 무시한 것들이었습니다. 언론의 보도만으로 판단한다면 車範根 감독은 제명을 백 번 당해도 시원치 않을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방송(SBS)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약 3분의2가 「車範根 감독에 대한 어떤 징계에도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한번 車範根 감독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판단이 다르게 나왔습니다. 왜 언론은 여론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국민 다수는 공정하지 않은 언론의 보도를 가려내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안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은 車範根 감독을 일방적으로(때로는 치졸한) 표현으로 뭇매질했지만 국민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車範根에 대한 애정은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여론을 반영하지 않고 여론에 뿌리내리지도 못하는 언론은 헛돌다가 종국에 가선 여론의 파도에 휩싸여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車範根 감독은 月刊朝鮮 8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로운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 국제적인 경쟁력이 있어요. 국내에선 안되지만. 정치도 마찬가지예요. 신사고를 갖고 신선하게 하는 사람은 국내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국제적으로는 경쟁이 돼요. 기득권층 사람들은 우리들끼리의 싸움에선 먹히는데 절대로 국제적으로는 안돼요. 왜? 발전이 없고 스스로가 뿌리를 못 키우고 있으니까』
  
  車範根 감독은 자기처럼 국제적으로 통하는 사람은 국내의 싸움판에선 생존하기가 어렵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축구협회와 언론은 車範根 감독을 짓밟는데 성공했습니다. 대한 축구협회 상벌위원회는 8월12일 車範根 감독이 주장한 승부조작설은 자체 조사결과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다면서 「5년간 국내 지도자 자격정지」란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지난 8월4일에 방영된 MBC-PD수첩팀의 추적결과를 보면 승부조작은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여러선수와 감독이 나와서 實名으로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즌 막판에 가서 우승할 희망이 없게되면 일부러 져주는 게임을 한다. 최하위팀이 되어야 다음해에 신인 선수들을 우선적으로 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匿名(익명)으로 등장한 前프로 선수는 「져주기와 득점왕 만들어 주기」에 대해서 증언했습니다. 車範根 감독은 이미 1996년 10월 22일자 스포츠서울에 쓴 칼럼에서 「일부러 져주기 이젠 과거사이기를」 이란 題下의 승부조작 체험기를 쓴 적도 있습니다. 축구협회가 자체 조사에서 자신들의 명예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만한 결론을 낼 수 없으리라는 점은 이해할 만 합니다. 그렇다면 車範根 감독에 대한 징계도 하지 않는 것이 염치(廉恥)있는 행위일 것입니다. 객관적인 자료와 증언들은 승부조작의 實在를 뒷받침하고 있는데 車範根 감독을 허위사실 유포자로 몰아서 5년간 직무정지를 요구한다는 것은 「우리들끼리의 싸움을 잘하는 기득권층 사람들」의 행태치고도 지나친 것입니다.
  
  좋은 신인 선수들을 얻기 위해서 시즌 막판에 져주기 시합을 하는 데 대하여 그 사실을 태연히 인정하면서 『이 정도를 가지고 승부조작이라고 할 수 있나』라고 강변하는 축구인과 기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져주기가 승부조작이 아니라면 國語사전을 바꿔쓰든지 우리의 양심을 바꾸든지 택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억지가 통하는 축구판을 보면 車範根 감독이 한 말-『우리 축구판은 정치판 같다』-이 생각납니다. 조직 내부의 부정을 고발하는 사람을 평가하고 보호해 주지 못하는 사회, 기득권층이 그 고발자를 인격적으로 말살하려 들고 이를 견제해야 할 언론이 그런 「죽이기」에 합세하는 사회가 이 나라에 있습니다.
  
  이런 나라는 자체문제 해결능력과 自淨능력이 결여되어 IMF 같은 대형의 강제력이 작용하기 전에는 끝없이 내부투쟁에 함몰하고 맙니다. 이번 車範根 파문에서 저는 대한민국의 위기, 그 본질을 보았습니다. 조국을 떠난 車範根 감독의 비극이 「인류와 천재를 감싸주지 않고 도덕적으로 몰아 죽이려 드는 나라」에 태어난 때문이라면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는 곳입니다. 천재들은 專門분야에 모든 것을 투척하여 자신의 生을 불태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생활도 社交도 친구도 없습니다. 또 없어야 합니다.
  
  이들은 「인사성이 밝다」느니 「인간관계가 좋다」는 것으로써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영원한 진리와 작품과 감동과 발명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수억, 수십억 凡人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천재들에게 凡人 수준의 인사성과 인간관계를 요구해선 안됩니다. 모차르트를 향해서 「버르장머리가 없다」, 베토벤을 향해서 「건방지다」고 욕하면서 그들의 천재성을 죽이는 나라가 있다면 천재들은 국외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創始者)인 白南準씨가 국내에서 활동했더라면 과연 그렇게 대성할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백남준(白南準), 車範根 같은 천재를 외국으로 내모는 조국은 잘해야 2류 국가일 것입니다. 일류 국가의 필수 조건은 많은 일류 인물들, 즉 천재들의 존재인 것입니다. 凡人이 「천재에게 감사를」바칠 때 천재들도 凡人에게 침을 뱉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1998년 9월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