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일 로버트슨 기념사업회 회장 이야기
“국내보다 해외에 거주한 시간이 더 많기에 조국의 발전을 더욱 실감합니다. 이를 가능케 한 한미동맹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죠. 로버트슨 차관보가 아니었다면 한국은 물론 미국에도 불행한 역사가 도래했을 겁니다.”

나경태 (서울대 총동창신문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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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S. 로버트슨 미 국무부 극동문제담당 차관보는 우리 현대사의 숨은 영웅입니다. 한미 양국 대통령의 입장 차를 좁히고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어요. 그 덕분에 우리나라는 지난 70년 동안 북한의 남침을 억지하고, 튼튼한 안보 위에서 빛나는 발전을 이룰 수 있었죠. 그분을 널리 알리고 오래 기억하자는 뜻에서 작년 6월 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신승일 로버트슨기념사업회 회장은 1957년 모교 화학과에 입학했다가 1962년 미국 브랜다이스대에 다시 입학해 학사,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엔개발계획에서 국제백신연구소 설립을 기획하고, 그 연구소가 母校 연구공원에 유치되는 데 앞장섰다. ‘암곡학술기금’ 10억원을 모교에 기부했고, 2017년 모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5월 30일 잠실 롯데호텔 카페에서 신 회장을 만났다.

 

“국내보다 해외에 거주한 시간이 더 많기에 조국의 발전을 더욱 실감합니다. 이를 가능케 한 한미동맹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죠. 로버트슨 차관보가 아니었다면 한국은 물론 미국에도 불행한 역사가 도래했을 겁니다.”

 

1953년 5월 29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중앙정보부(CIA)·국무부·국방부·합동참모본부 등 5개 부처 고위급 관료들이 참석한 합동회의에서 이승만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에버레디(Ever-ready) 작전이 논의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조속한 종식을 내걸고 당선됐으나, 휴전 회담을 시작하고 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던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강력히 휴전을 반대했기 때문. 에버레디 작전의 핵심은 이 대통령을 구금하고 계엄을 선포, 유엔사령부 휘하의 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작전이 1952년 7월 기획된 바 있었고, 미국에 우호적인 백선엽 참모총장이 마침 워싱턴에 와 있었다. 에버레디. 이름 그대로 언제든 준비된 상태였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결론이 정해진 회의 분위기를 180도 뒤집었다.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한국 정부를 접수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입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철저한 반공주의자란 점에서 로버트슨 차관보는 이승만 대통령과 통했습니다. 다른 고위급 인사들이 이 대통령을 ‘고집불통 늙은이’로 치부할 때 그는 조국의 독립과 안보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진정한 애국자라고 평가했죠. 중국 주재 미국 대리 대사를 지냈던 로버트슨 차관보는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을 몹시 아쉬워했어요. 한반도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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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슨 차관보와 이승만 대통령.




 

신 회장은 영화 ‘오펜하이머’를 예로 들어 국제 공산당의 무서운 속성을 설명했다. 핵폭탄 개발이란 극비 프로젝트 내에도 공산당 관계자들이 다수 발견될 만큼 깊숙이 침투했고, 그로 인해 2차 세계대전 승전의 주역 오펜하이머 박사도 사상 검증을 받았다고. 평등사회란 슬로건으로 숱한 지식인을 매료시켰지만, 현실정치로 이전될 땐 예외 없이 독재 체제로 변질한 공산주의의 속성을 로버트슨 차관보도 절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소신 발언으로 에버레디 작전은 폐기됐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때만 해도 한국과 미국의 격차는 다윗과 골리앗 아니겠습니까. 세계 최강국이 극동의 빈곤국과 동등한 지위에서 조약을 체결해줄 리 없었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동맹이 아닌 ‘한국 방어’ 성명과 군사지원 행정 협정, 10억달러 경제 원조를 제시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단칼에 거절했죠. ‘조약’이 아니면 안보를 확보할 수 없다고 봤어요. 그 와중에 1953년 6월 8일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포로 송환문제가 타결됩니다. 한미동맹 없이 휴전이 임박하자 이 대통령은 수만여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해버리죠. 휴전 회담을 무산시킬 의도로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정신착란자’라며 이승만 대통령을 맹비난했지만, 이 대통령은 굴하지 않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없이 휴전을 맞으면 북한에 공산군이 증강되고 또다시 침략을 자행할 게 뻔했기 때문. 로버트슨 차관보는 반공 포로 석방 직후 대통령 특사로 급파돼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20일 동안 12차례 회담을 진행했다.

 

“처음 8일 동안은 이 대통령이 미국을 맹비난하는 데 시간을 다 썼다고 합니다. 한일 합방 및 한반도 분단과 관련한 미국의 실책을 조목조목 따졌다고 해요. ‘슈퍼 갑’을 상대로 웬만한 배짱 갖곤 못할 일입니다. 그걸 경청했던 로버트슨 특사도 대단하죠. 워싱턴에서 진전이 없으면 철수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는데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끝내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통해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함께 한미동맹 조약 초안을 제시했다. 12차 회담 다음 날인 1953년 7월 12일, 서울과 워싱턴에서 상호방위조약, 포로 문제, 한국의 자유·독립·통일을 위한 공동 노력 등에 합의한다는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이 대통령 축출 작전을 취소시킨 당사자가 특사로 내한해 20일간 머물면서 이룩한 합의다. 한미동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당시로선 매우 드물게 진보적인 휴머니스트였습니다. 그때 고위급 인사들은 대부분 백인 우월주의나 식민 시대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의 언동에선 인종차별적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이 대통령과 합의를 이뤄가는 과정에서도 1대 1로 존중했고,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 정신과 의지를 높이 평가했죠. 로버트슨 특사가 파견된 것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 2024-07-02, 17: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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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stkorea     2024-07-03 오전 10:49
Thank you, Mr. 신승일, for informing me about
an important historical truth in Korea.

Koreans now enjoy their lifestyles thanks to individuals
who worked hard to ensure Korea's safety with the USA.

I agree with him that the more time he spends overseas,
the more he appreciates his own country, Korea.

Thanks very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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