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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뉴스 한상봉 기자의 글 “천주교 뉴라이트 ‘대수모’는 가톨릭 판 일베”를 읽고나서
작성자 김찬수 작성일 2015-10-10 오전 5:58:02  (조회 : 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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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뉴스 한상봉 기자의 글 “천주교 뉴라이트 ‘대수모’는 가톨릭 판 일베”를 읽고나서,

          

김찬수 | 조회 1 |추천 0 |2015.10.10. 05:48 http://cafe.daum.net/parkgunhye/U8YZ/662516  
      

가톨릭 뉴스 한상봉 기자의 글 “천주교 뉴라이트 ‘대수모’는 가톨릭 판 일베”를 읽고나서,


글 : 대한민국수호 천주교인모임(약칭 대수천)

      교리연구소장 김원율 안드레아 

입력 : 2015. 10. 9.

 

 

 10월 2일자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의 ‘교회와 세상’이라는 칼럼에서 한상봉 기자는 대수천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을 쏟아내고 있다. 먼저 한상봉 기자가 대수천에 대하여 쓴 글을 먼저 소개하고 그에 대하여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돕는 길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그의 글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대수모는 왜 교종의 좌파적 교회론을 비난하지 않는가?

추기경 옹호하면서 사제들 비난하는 모순

 

이런 프란치스코 교종을 따르는 이들을 한국사회에서는 ‘친북, 반미, 반정부 정치사제’라고 부른다. 약칭 ‘대수천’이라 부르는 ‘대한민국수호 천주교인모임’(이하 대수모)에서는 광주대교구 김희중 대주교와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 수원교구 이용훈 주교를 포함해서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을 하거나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 동조하는 이들을 싸잡아 ‘정치사제’로 부른다.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교회 안에서 정치사제들을 ‘퇴출’시키자는 것이다. 이들은 정의평화위원회를 ‘불의갈등위원회’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들이 프란치스코 교종을 ‘정치교황’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이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천명한 평신도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정치사제’들에게 복종하지 말고, 이런 본당에는 교무금과 헌금도 내지 말라고 부추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는, 이들이 정진석 ‘추기경’의 용퇴를 주장한 사제들을 비난하면서, 이들과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고 판단한 ‘주교’와 ‘사제’들의 퇴출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종을 거부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 가톨릭교회에 속해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므로 자제하고 있는 형국이며, 한국교회의 교도권에 대해서는 정치적 지향을 잣대로 삼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들은 지역교회를 폄하하고 로마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으며, 교종이 그렇게 비판하시는 ‘웰빙-번영신학’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이 수호하고 싶어 하는 ‘대한민국’은 박정희, 박근혜의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이들이 섬기는 하느님은 이명박 류의 개발주의자들이 섬기는 우상이다. 이들 식으로 말하자면, 교종이 늘 강조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처럼 좌파적 교회론은 없다.

 

이들은 사제권위에 눌려 있지 말라고 평신도들을 부추기면서, 한편에선 일부 성직자들의 권위에 매달려 있다. 이들이 한사코 군종출신의 부산교구 김계춘 신부와 예수회의 박홍 신부, 이한택 은퇴 주교, 오웅진 신부 등에게 매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계제도에서 비교적 비껴나 있지만 그래도 주교이고 사제라는 점에서 ‘천주교단체’로서 효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 묻고 싶다. 그렇지만 복음적 판단은 사라지고 정치적 판단만 남아 있는 단체를 ‘천주교’단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교회의에서는 주교단에 속한 주교들과 사목 일선에 있는 사제들을 ‘독재자’라고 비난하며, 퇴출을 요구하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할까? 이들은 한사코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이를 계승한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를 ‘대한민국’과 동일시한다. 이들이 지키려 하는 것은 수구세력의 기득권일 뿐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가난한 이들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도록 요청하기 때문이다.

 

천주교 정치단체 ‘대수모’.... 언어폭력 감추지 않아

 

교도권에 대한 일체의 존중심도 찾아볼 수 없는 ‘정치단체’에 불과한 ‘대수모’에 대해서 주교단은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 묻고 싶다. 주교단과 주교회의 소속 기구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소속 사제들을 지키는 한편, 교구 신자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교구장 주교 역시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한다. 예전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매일미사>와 관련한 비판기사를 실었을 때 주교회의 사무처의 책임사제가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자발적으로 삭제해 줄 것을 구두로 요청한 적이 있다. <매일미사>처럼 주교회의의 직접적인 재정적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문제라서 ‘대수모’의 문제를 주교회의가 방치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교회는 이익단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이며, ‘대수모’ 문제는 신앙공동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안이기에 중대하다.

 

‘대수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이들의 언어가 지극히 원색적인 선동적 정치 언어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이들이 퇴출운동을 벌이고 있는 분당 성 마르코 성당의 김기창 신부에 대해 ‘친북반역신부’, ‘북한 앞잡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는데, 이들이 보기에 현재 한국교회는 ‘빨갱이 종교’인 셈이다. 이들이 전하는 교회개혁은 이런 빨갱이 주교와 신부를 퇴출시켜 교회를 정화하고, 대한민국 수호에 걸맞는 교회로 거듭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참된 교회’란 ‘어용 교회’와 다르지 않다. 복음이 지닌 신선한 활력,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 자비를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 방송이나 에나 등장할 만한 자극적인 언어를 즐겨 사용하는 이들이 스스로 ‘애국세력’임을 자처하고 있다. 서북청년단을 연상시키는 ‘대수모’의 언어는 폭력적이다. 시국기도회를 방해하기 위해 ‘대수모’와 함께 성당에 난입한 무리들 가운데 장난감 권총을 소지한 자도 있었지만, 언어폭력도 폭력이다. 이런 점에서 천주교뉴라이트에서 시작된 ‘대수모’는 ‘정치노인’들의 ‘가톨릭판 일베’다.

 

한상봉기자가 보는 세상과 대수천의 회원들이 보는 세상이 같을 수는 없지만 한상봉기자가 원천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잘못 되어있음을 반론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필자의 눈길을 끄는 사실은 한상봉기자가 줄곧 프란치스코 교황을 ‘교종’이라고 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호칭부터가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한기자가 알고서 쓰고 있는지 사실 의문이다.

 

천주교 내의 ‘정치사제’(한기자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뜻을 따르는 사제들을 대수천 신자들이 ‘정치사제’라고 부른다고 그의 글에서 밝혔다. 이에 대하여는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들이 선거 때마다 특정 세력을 옹호하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한기자는 인지하지 못하였다고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1987년 12월 천주교 연대는 김대중씨를 범국민 단일후보로 선택하였다고 발표하였고 대선 후에는 여당후보가 당선된 선거의 무효투쟁을 전개하였다. 2007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참여정부의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당시 정치사제들이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정평위 위원장 인권주일 담화문 형식으로 전 교구의 성당에서 친노후보를 지지하는 글을 강론대신에 읽게 하였고 각 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유인물 등으로 대선에 개입한 바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행한 선거개입은 잊고서 1년 후 국정원 직원이 공무원의 정치중립의무를 위반하였다면서 전국을 돌면서 대선무효 및 대통령 퇴진시국미사를 전개하였다. 이런 정치사제들의 과도한 정치개입이 결국 자발적인 평신도 단체의 결성에 이르게 된 원인임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사람이 알고 있다.

 

이들이 대통령 퇴진 시국미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교황의 한국방문이 결정되었다. 그들은 당연히 바티칸의 국가원수로서 한국을 방문하는 교황께서 한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이 결정되었고 이로써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인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들의 대통령 퇴진 시국미사의 영향력이 소멸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교황방한을 극력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순교자의 땅 한국을 사랑하시는 교황께서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방문을 결정하시자 이들이 잔머리를 굴린 것이 교황을 교종으로 격하시킨 것이었다.

 

광화문에서 순교자 시복식에 새벽부터 모인 100만 교우들의 인파를 생각하면 교우들을 포함한 일반시민들까지 교황에 대한 존경심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요한 23세나 요한 바오로 2세의 성인시성이 나타내듯 근세의 교황님들은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이나 주교단의 으뜸이 아니라 스스로를 회칙 등에서 ‘하느님의 종의 종’으로 낮추셨다. 이러한 교황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지대한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자 반역세력들은 교황을 어느 한 종파의 수장인 것처럼 교종으로 격하시켜 부름으로써 교황님이 대통령을 만나심으로써 대통령의 법적 정통성이 확립되는 것을 막으려는 꼼수를 부렸다. 이들은 그리하여 보편적인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서의 교황이 아니라 마치 조계종 종정, 태고종 종정 등과 같이 어느 한 종파의 으뜸스님을 가리키는 이미지를 차용하는 구차한 술수를 부렸던 것이다.

 

이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던 강우일 주교는 18대 선거가 끝나자 2012년 성탄 미사에서 1469만명의 국민이 집단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고 비탄에 잠긴 강론을 하였다. 국정원해체, 대통령 퇴진 시국미사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였고 7년간 강정마을 해군기지를 반대하면서 엄청난 예산의 손실을 국가에 안겼다.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을 내린 사법부의 결정을 히틀러의 폭정에 비유하였고 세월호의 비극을 베들레헴 인근의 유아를 학살한 헤로데의 폭정에 비유하였다. 참으로 엄청난 집착이요 망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강우일 주교가 교황께서 박대통령을 면담하시겠다고 하자 돌연 200년 한국 천주교 역사상 줄곧 통용되던 교황의 명칭을 교종으로 격하시켜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강우일 주교를 성인처럼 따르던 그 졸개들이 교황을 교종으로 따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각 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된 인쇄물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기자는 ‘대수천’이라는 정식 명칭 대신에 ‘대수모’라는 약칭을 마음대로 지어내어 사용하고 있다. 요사이 노사모가 강경하고 극렬한 정치집단으로 비난받는 것에 빗대어 은연 중에 대수천을 노사모와 같은 정치집단으로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대수천의 카페는 전체적으로 독자게시판 형식으로 운영되는 인터넷이며 그러다보니 많은 분이 들어와서 자유로이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신부님 퇴출의 글이 올라오거나 헌금거부 등의 의견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대수천의 공식입장이 아님을 밝히는 바이다. ‘지금여기’의 독자게시판을 생각하면 한기자께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소 과격하거나 순화되지 않은 언어들이 올라오고 있지만 이에 대하여는 대수천에서도 대응하는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다.

 

한기자는 대수천 문제가 신앙공동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중요하다고 주장하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들의 행동을 성찰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신부들의 과도한 정치개입이 없었다면 대수천이라는 조직자체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기자는 정치지향에 따라 대수천이 사제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는데 참으로 자기중심적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대수천 회원이 지도신부이신 김계춘 신부님을 존경하는 것은 정치적 지향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청렴성과 정치적 중립성 때문이다. 대수천은 정치사제들을 제외한 중립적인 사제 모두를 존경하고 따르고 있다. 그러나 정치사제들은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제에 대하여는 온갖 핍박을 가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정추기경께서 4대강 문제에 대하여 천주교회는 중립적이라고 밝힌 것을 정치사제들이 명동성당 개발문제까지 엮어가면서 인신공격적인 비난을 퍼붓고 용퇴를 주장한 것이 하느님을 따르는 사제로서 합당한 행동이었는가를 자신의 양심을 걸고 묵상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옳으며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행동하는 교만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제 오늘 충남을 위시한 중부지역의 불타는 가뭄이 연일 신문과 TV에 보도되고 있다. 올해 강수량을 보면 서울‧경기 지역(평년 대비 42%)이 충남(평년의 49%)보다 더 나쁘다. 그러나 수도권에서 생활용수는 물론 농업‧공업용수까지 별탈없이 넘긴 것은 다목적댐과 한기자가 말한 ‘이명박 류의 개발주의자들‘이 세운 4대강 보(洑)덕이다. 4대강은 이명박 정부 내내 천주교 연대(정의구현사제단과 정의평화위원회의 연합체)가 결사반대하면서 교회내의 분란과 갈등을 엄청나게 초래하였던 사안이다. 영월 동강 댐을 위시하여 중부지역에 물을 댈 수 있는 다목적의 대용량 댐은 천주교 내의 환경교조주의자를 위시한 환경탈레반들의 극력반대에 부딪쳐 착공조차도 하지 못하였다. 그것이 오늘의 중부지역의 불타는 가뭄으로 인한 농업용수, 가정용수의 부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천주교 내의 환경주의자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원자력 발전소와 해군기지를 포함한 정부사업에 대한 천주교 내의 반국가 세력의 반대는 이미 평신도 뿐만 아니라 건전한 양식을 가진 시민들도 큰 우환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기자는 자신의 글 내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회를 더욱 급격하게 가난의 굴레로 몰고 있는 세력이 바로 천주교내의 반국가 세력이다. 이들은 제대로 된 경제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제들이다. 예컨대 최저임금제를 거의 배나 올려야 한다고 하면서 재벌독재를 외치는데 재벌기업의 임직원은 최저임금제와 관계가 없다. 최저임금제로 내는 돈은 거의 중소자영업체 사장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다. 젊은 창업자가 커피 전문점을 내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해도 극심한 경쟁으로 겨우 200만원 버는데 아르바이트 생에게 200만원을 주어야 한다면(이들이 주장하는 시간당 만원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200만원 월급이 나온다) 창업자가 무슨 여력으로 추가 고용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고용한파가 닥칠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사제단의 신부들이 쌍용차 실직자를 위한다면서 광화문 거리에서 300회 가까운 시국미사를 하였는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지금 이 나라는 구조조정의 총대를 매고자 하는 관료나 은행원이 아무도 없다. 이로써 일어나는 현상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갚는 한계기업(이른바 ‘좀비기업’)이 8천개 가까이 오랜 기간 존재하지만 제대로 이런 기업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젊은 창업자나, 유망한 IT기업에 가야하는 재원이 모두 낭비되고 있으며, 순차적으로 젊은 세대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이른바 3포, 7포세대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의 피조물인 사회구조를 변혁하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자신들이 예언자적인 직분을 행한다고 하지만 한마디로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만 뱉어내고 있다. 지금 평신도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들이며 어리석은 무지렁이들이 아니다.

 

박정희 정부나 박근혜 정부를 호위하고자 일어난 것이 대수천이다? 당신들은 그러면 친북 정부, 김정은의 입맛에 맞는 정부를 수립하고자 일어난 세력들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수천은 사제들이 거룩한 강론대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해야겠다면) 취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참된 교회’의 뜻이다. 2012년 5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관리위원회에서 4대강에 대한 찬성 반대 집회는 선거운동에 해당하며 선거법에 위반한다고 분명히 발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연대는 5월 10일 양수리에서 대대적인 4대강 반대 시국미사를 개최하여 선거법을 공공연하게 위반하였다. 이들이 교회법을 어기고 나라법을 어긴 사례는 책 한권을 쓰고도 남을 것이다. 자신들이 행하는 큰 잘못은 눈감은채 남의 눈에 티를 없애겠다고 하는 교만을 버리기 바란다.

 

한기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을 따르는 사제들을 대수천이 ‘정치사제’라고 비난하고 있다고 자신의 글에서 밝혔다. 이들은 프란치스코 교황만이 마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처럼 새삼 말하고 있지만 교회는 초기 교회 때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한 적이 없었다. 우선 라우렌시오 성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 재산을 전부 나누어 주었다가 로마 제국에 의하여 화형된 사건에서 보듯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하여 돌보아 왔다. 이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복음의 선포와 전례와 더불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봉사(디아코니아 ; Diakonia)를 등한시 한 적이 없음을 회칙은 밝히고 있다. 흔히 사회교리를 주장하는 사제들이 초대 교회의 사막의 은수자들이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몰두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3세기 경 사막의 은수자였던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하기 전에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사회교리를 주장하면서 일관된 사회교리의 정신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국가가 개입하여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으며 이는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에서도 나타나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선의를 함양하고 성령의 과실인 선의와 호의에 의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공동체와 나눌 수 있도록 신자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사제의 본분이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랑의 정신을 전하는 사제의 길이다. 정녕 교황님의 복음의 정신을 따른다면 당신들은 내일부터라도 길거리에서 시국미사인지 무엇지를 한다면서 시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신자들의 걱정을 자아내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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