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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릉 답산기
작성자 송촌산인 작성일 2018-02-10 오후 12:58:01  (조회 :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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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릉은 여주에서 서쪽으로 약 4km 거리에 있는 능서면 왕대리(旺垈里)에 있다.
정조13년(1789)에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여주에 의하면 왕대리는 길천면(吉川面) 관할이었는데 1914년 부․군․면 통폐합시 영릉이 여주군에서 서쪽에 위치한다하여 능서면이라 칭하게 되었다. 또한 왕대리는 고려 32대 우왕(禑王)의 유배지로 그곳을 일명 왕터(王垈)라고도 부른다<「여지도서」여주 고적조,「고려사절요」우왕14년(1388)9월조>.
영조 때 병조정랑(兵曹正郞, 정5품)을 지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지은「택리지(擇里志)」팔도총론 경기편에 의하면 세종의 영릉(英陵)에 대하여 술사(術士)가 평하기를 ‘회룡고조(回龍顧祖, 속리산에서 나온 지맥이 휘돌아서 본래의 속리산을 마주대한 자세의 생김새) 형국으로서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향)으로 향하였고 물길은 신방(申方, 서쪽에서 남쪽으로 30도 방향)에서 득수(得水)하여 진방(辰方, 동쪽에서 남쪽으로 30도 방향)으로 파문(破門, 흘러나가는 물이 왕릉에서 보이지 않는곳)하므로 여러 왕릉중에서 제일이라(術士言回龍 子坐申水入辰 爲諸陵中第一云)’고 하였다. 일부에서는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모란반개형국(牡丹半開形局)으로 보고 있으니 영조때까지 회룡고조형국으로 전래된 것을 뒤집는 격이다.
 
2. 산형세
가. 한남정맥과 금북정맥 분리
안성시 죽산면과 금광면 경계를 가르는 칠장산에서 한줄기가 다시 북쪽으로 관해봉(457m)과 도덕산(366m)으로 내달리어 녹배고개에서 낮아졌다가 안성 장호원간 지방도로를 지나 죽산 북쪽 4리 되는 곳에 있는 비봉산(飛鳳山, 372m)으로 이어지는데 옛 죽산현의 진산(鎭山, 고을을 수호하는 산)이 되며 죽산에서 서쪽으로 22리 지점에 있는 구봉산(九峰山, 465m)에서 외삼들을 지나 문수봉(文殊峰 404.2m)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내려 무너미고개를 넘어 함박산(函朴山 349m), 학고개를 넘어 부아산이 된다.
부아산(負兒山, 403m)에서 내려오는 맥이 우뚝 솟은 성봉(星峰)이 웅장하게 서려 메주고개에서 낮아졌다가 석성산(石城山, 471m)으로 솟아나고 이 산이 바뀌고 변하여 마성(馬城)고개 계곡을 지나 경부고속도로 신갈분기점을 넘어 용인, 의왕, 수원, 3고을의 경계에 광교산(光敎山, 592m)이 우뚝 솟아 있다.
백운산에서 서쪽으로 달려가 지지대 고개에 이르러 낮아 졌다가 다시 솟아 오봉산(五峰山)이 되고 북서쪽으로 안양 수리산(修理山, 474m, 見佛山이라고도 함), 인천 철마산(鐵馬山. 226.5m) 계양산(桂陽山. 395m, 옛부평도호부의 진산으로 安南山이라고도 함), 김포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 가현산(歌絃山.215m), 필봉산(筆峰山.132m), 수안산(遂安山.146.8m), 문수산(文殊山.376m)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漢南正脈)이 형성된다.
한남금북정맥의 분수령을 이루는 칠장산(七長山 492.4m)에서 두 줄기로 갈라져 하나는 죽산 남서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는 칠현산(七賢山 516.2m)에서 천안방향으로 뻗어내려 금북정맥이 된다. 칠현산의 원래 이름은 아미산(蛾眉山)이었고 이곳에는 칠장사(七長寺) 절집이 있다.
칠장사의 원래 이름은 큰 옻나무를 뜻하는 칠장사(漆長寺)이었다. 칠장사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에서 살다가 6.25당시 북한 부수상을 지낸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1888-1968)가 지은 소설 임꺽정 내용중에 조선조 중종때 병해대사(甁亥大師)가 칠장사에 주석(駐錫)하고 있을 때 임꺽정이 여러차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였기 때문에 절집 이름이 유명해 졌다.
임꺽정은 본래 경기도 양주사람으로 백정으로 알려진 의적으로 유명하다. 우리 정사(正史)에 나오는 실존 인물로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표기 되었으나 임거정(林巨正)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명종실록」명종17년(1562) 1월 1일(丙戌) 황해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 선조3년 7월 乙酉 卒)이 군관 곽순수(郭舜壽), 홍언성(洪彦誠)등에게 체포되었다고 상부에 보고한 사항이 실려있다.
고려 문종때 혜소국사(慧炤國師) 정현(鼎賢 972-1054)이 이 절에서 수도하다가 입적하여 보물 제488호 혜소국사탑비가 있다. 혜소국사가 부랑아 7명이 스님의 교화를 받아 모두 현인이 되었다고 하여 아미산을 칠현산으로 고쳐 불렀다 한다.
중국 서진(西晉 265-316)때 산도(山濤), 왕융(王戎), 유영(劉彾),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嵇康), 향수(向秀)등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죽림에서 도를 깨쳤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안성 일죽면 죽림리에 죽림산(竹林山 352m)이 있고 칠현산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도 유림들이 죽림칠현이 출현되기를 고대해 지은 이름으로 본다.
칠현산에서 대문령(大門嶺), 장고개, 배티고개를 넘어 서운산이 솟아있다. 안성 남쪽 20리 지점에 서운산 서쪽 봉우리에 단(壇)이 있고 단 아래에 우물 3이 있으며 용이 승천할 때 상서로운 구름이 모였다(「淮南子」天文訓의 註에 雲生水故 龍擧而景雲會也라 하였음)하는 서운산이 경기 안성시 서운면과 충북 진천군 백곡면, 충남 천안시 입장면 3개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운산(瑞雲山 547m)에 고려말 공민왕때에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 1. 15 - 1376. 5. 15 57세 卒)이 개창한 청룡사(靑龍寺)가 있다. 청룡사는 본래 고려 원종(1259-1274)때 명본국사(明本國師)가 대장암(大藏庵)으로 처음 창건한 절 이었다.
대사의 이름은 아혜근(牙惠勤)이고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이며 영해부(寧海府, 현 경북 영덕군 영해면) 사람이다. 법호가 나옹이고 공민왕 21년(1371) 8월에 왕사(王師)로 봉하여 보제존자로 삼고 시호가 선각(禪覺)이다(보제존자시선가탑명 참조).
청룡사 어구에는 숙종 46년(1720)에 세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24호 청룡사 사적비(靑龍寺 事蹟碑)에는 나옹선사가 지정(至正 1341-1367)연간에 이 산에 와서 지혜의 해가 거듭 빛나고 자비의 구름이 광채를 뿜어내어 이곳에 신비한 징조가 있겠다고 생각하였는데 과연 구름은 물에서 생겨서 꽃비가 내리는 와중에 용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미소지으며 절을 창건하여 산 이름을 청룡산(靑龍山)에서 서운산이라 하고 절집 이름을 청룡사라 하였다고 동현거사(洞玄居士) 나준(羅浚)이 비문을 지었다.
청룡저수지에서 크게 엎드렸다가 살그머니 일어나는 형상을 하고 있는 진천의 엽둔재(葉屯峙 330m)고개를 지나 천안시 입장면의 위례성산(慰禮城山)과 직산읍 동쪽 21리에 있는 성거산(聖居山)을 거쳐 천안 목천읍에서 서쪽 11리에 있는 흑성산(黑城山 519m)이 웅장하게 솟아있고 여기서 벌판을 지나 예산 덕산면에서 서쪽 11리 지점에 있는 가야산(伽倻山 678m)으로 이어져서 금강 북쪽으로 치달리는 금북정맥(錦北正脈)이 형성된다.
성거산이 뻗어 내려온 거리는 멀다. 장백산(長白山)에 뿌리를 박고 길게 뻗어 천여리를 동해바다를 옆에 끼고 남으로 계속 다름질 하다가 또 천리를 내려와 남쪽으로 수백리를 달려 불쑥 솟은 산이 성거산인데 고려 태조 왕건의 고조부인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대왕(虎景大王)의 사당이 이곳에 있기 때문에 성거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신라의 성승(聖僧)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 산에 와 있었으므로 산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고도 한다.
 
나. 독조지맥
한남정맥의 용인시 원삼면과 호동경계의 문수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내려 곱등고개와 어두니 고개를 넘어 양지면에서 남쪽 7리 되는 곳에 있는 어은산(御隱山 447.1m)에서 용실고개와 독조봉(獨朝峰.432m), 좌찬(佐贊)고개를 넘어 안성 죽산면에서 북쪽으로 40리 지점에 있고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는 건지산(乾芝山 411.3m, 巾之山이라고도 함)이 된다.
좌찬고개는 양지에서 죽산으로 통하는 17번국도가 지나가는 고개라 하여 좌찬현(佐贊峴)이라고 부른다. 용인시 백암면 옥산리는 죽산박씨 집성촌으로 조선 세조 때 의정부 좌의정을 지낸 박원형(朴元亨 1411-1469, 묘소 백암면 옥산리 하산마을)의 출생지이다. 박원형은 세종14년(1432) 사마시에 합격하고 예빈시직장, 의금부도사, 사복시정, 좌승지, 도승지를 거쳐 정난공신 연성군(延城君)이 된후 우찬성, 좌찬성이 되어 고향에 가기위하여 이 고개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종12년(1481)에 편찬하고 중종25년(1530)에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죽산현 역원조에 도울좌(佐)자의 좌찬역(佐贊驛)이 있었고 「호구총수(戶口總數)」양지현조에 주동면(朱東面) 좌찬리(佐贊里)지명이 나타난다.
조선조의 관직에 종1품의 좌․우찬성(左右贊成)벼슬이 있다. 고개이름에 종1품의 좌찬벼슬을 준 것은 세종 때 헌릉지방을 벼슬언(彦)자를 써서 언주(彦州)라고 내려준 예가 있고 나무에 벼슬을 준 예가 세조 때 충북 보은군 속리산 정2품송이 있다.
이천시 마장면과 용인시 원삼면 경계의 건지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려 뒷동골산(222.7m), 봉의산(鳳儀山 331m), 이천 남쪽 26리 되는 곳에 있는 대덕산(大德山 309.4m)에서 입석재고개와 사실터고개를 넘어 종부고속국도를 지나 마국산(444.5m), 큰바레기산(416m), 노성산(老星山 274m)으로 이어진다.
이천시 설성면과 안성시 일죽면 경계의 노송산에서 북동쪽으로 머리를 돌리어 보째고개, 정수고개, 문드러니고개, 병무관고개 등 4고개를 넘어 철갑산(鐵甲山 225m)에서 여주군 가남면과 여주읍 경계의 대포산(大砲山 251m)에 이르고 대포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능서면과 여주읍 경계의 북성산(北城山 275m)이 된다.
북쪽에서 뻗어내려와 뭉친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래 성산(城山. 고성터가 있음)이었던 것을 북성산이라 지은 듯 보이니 곧 여주의 진산(鎭山,「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주 산천조)이며 영릉의 주산(主山,「여지도서」여주 산천조)이 된다.
 
다. 좌향, 형국
주산은 혈처의 뒤쪽에서 내려와 형성되는 것이 대부분이나 혈처 앞 남서쪽에서 돌아 남향으로 형성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북성산에서 축간방(丑艮方, 북쪽에서 동쪽으로 30-45도 방향)으로 뻗어 131.1고지의 계방(癸方, 북쪽에서 동족으로 15도 방향)에서 자방(子方, 북쪽)으로 꺾어 다시 계방(癸方)에서 입수(入首)하는 자좌오향(子坐午向)이 된다.
형국은 속리산을 뒤돌아보는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이고 좌청룡 우백호가 왕릉을 감싸고 있어 신하들이 읍조리고 하례하는 모습으로 근엄해 보인다.
수국은 북성산 신지리(新池里)에서 발원한 물이 신방(申方, 남쪽에서 서쪽으로 60도 방향)에서 득수(得水)하여 안수(案水)가 되어 왕릉을 우선수하여 진방(辰方, 남쪽에서 동쪽으로 60도 방향)으로 빠져나가 소양천(昭陽川)에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왕릉산수형세를 일부 미술사학계에서는 회화적으로 표현한 회화성지도로 본다는 것은 지나친감이 있지 않나 보여진다.
왕릉터는 예종즉위년(1468) 12월 27일(癸丑) 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 1427-1498), 예조판서 임원준(任元濬 1423-1500), 한성부윤 서거정(徐居正 1420-1488)등이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손자이고 지충추원사 이종선(李種善. ?~1438)의 아들인 대제학 한성부원군 이계전(李季甸 1404-1459)의 분묘지로 천장하기로 정하고 청룡줄기에 위치한 광주이씨 우의정 이인손(李仁孫 1395-1463)의 분묘도 이장하게 된 것은 임금이 후손을 궁궐로 불러들여 묫자리를 양보하여 줄 것을 요구하여 이루어 졌다.
풍수지리상으로 좋은 자리라고 하여 이곳으로 왕릉을 천장하였기 때문에 일설에 의하면 조선왕조가 100년을 더 연장하였다 하여 이를 일러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고 부른다.
 
라. 이계전과 이인손 묘 이장
이계전은 장례지낸지 11년만에 여주군 점동면 사곡리로 이장하고 이인손은 6년만에 여주읍 연라리로 이장하였다. 이인손의 아들 5형제는 5자등과(五子登科)하니 첫째 영의정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이극배(李克培 1422-1495), 둘째 예조판서 광성군(廣城君) 이극감(李克堪 1427-1468), 셋째 예조판서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 1431-1494), 넷째 좌찬성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1435-1503), 다섯째 좌의정 광남군(廣南君) 이극균(李克均 1437-1504)이다.
이인손의 묘자리를 잡아준 지사가 말하기를 여기에 산소를 쓰되 봉분을 만들지 말고 신도비각도 절대로 세우지 말라고 경고하였지만 사대부집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무시하고 봉분과 비각을 세웠다.
당시 조정에서는 태종 헌릉의 오른쪽에 있었던 세종의 왕릉을 옮겨야 한다고 하여 각처에 지관을 파견하게 되어 이곳에 한 지관이 오게 되었는데 마침 소나기가 쏟아지자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가 맑게 개인 주변산세를 보니 앞산에 한기의 분묘가 눈에 띄어 바라보니 명당중의 명당자리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묘소를 옮기면서 연을 만들어 연이 떨어지는 곳에 묘를 옮기게 했는데 그곳이 바로 여주읍 연라리(煙羅里, 「호구총수」에는 首界面 煙蘿洞이라고 하였음)이며 이곳에 연이 떨어졌다하여 일명 연하리(鳶下里)라 한다는 말이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내고장의 전통 풍속과 자연, 1984,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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