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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판문점 유래를 읽고
작성자 송촌산인 작성일 2018-05-18 오후 7:55:30  (조회 :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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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8년 5월 1일자 A23 신문은 선생면에 ‘선조 피난갈 때 주민들 널빤지 문다리 만들어’ 제하의 글을 읽고 조심스럽게 조언 한다.
판문점이 원래 이름인 널문리는 널빤지로 만든 문이 있는 마을로 1592년 임진왜란때 선조가 피난 갈 때 백성들이 널빤지 문을 뜯어 다리를 만들었다 하여 그 후 마을 이름을 널문리라고 불렀다는 지명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고 하였다.
백성들이 널빤지(板) 문(門)을 뜯어다 다리(橋)를 만들었다면 충남 서천군 판교면, 성남시 분당구 판교처럼 다리 교(橋)자가 들어가는 판문교(板門橋)로 불러야지 다리 교자를 뺀 널문리로 부르는가!
 
1. 판적교(板積橋)가 판문교(板門橋)로 바꿔
영조36년(1760) 경에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장단부 교량조에 장단에서 서쪽으로 20리 거리의 진북면(津北面)을 가로 흐르는 판적천(板積川)위에 개천 이름을 딴 판적교(板積橋) 다리가 놓여 있다고 하였다.
판적천은 개성 천마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내려 화장산(華藏山)이 있는데 여기서 발원한 물이 여러 물과 합수하여 사천(沙川)과 합류하여 황해 바다로 들어간다.
선조가 동파역에서 장단을 거쳐 개성으로 피난 갈 때 판적교를 건너야 하는데 나무다리가 낡고 썩어서 마을 사람들이 널빤지 대문짝을 뜯어다가 다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널(板)을 깔아(적積) 만든 다리(橋)에서 쌓을 적(積)자를 빼고 널(板) 문(門) 다리(橋)로 바꿔 판문교 다리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진북면 관내에는 조산리(造山里)와 송산리(松山里) 두 마을뿐으로 남자 357명 여자 259명 호수 150호라 하였을 뿐 기사상 임난이 끝난 뒤부터 마을 이름을 널문리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하나 널문리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2. 판문점(板門店)을 판문점(板門點)으로 바꿔야
1953년 여름 판문교 다리 밑으로 흐르는 맑은 냇물로 목욕도 하고 식수용으로도 쓰기도 쉬워서 다리 부근에 천막을 치고 미·중·북괴와 휴전 협정 장소로 점찍어 놓자 널문다리의 다리교자를 빼고 점찍을 점(點)자로 써야 될 것을 가게 점(店)자로 써서 판문점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문 기사중 주막을 겸한 상점인 널문리 가게에서 휴전 협정 조인식이 열렸다고 썼는데 난리통에 가게 주인이 피난가서 빈 널문리 가게 안에서 서명식이 열렸겠느냐! 차라리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하면 될 것을, 판문점은 글자 그대로 물건을 파는 구멍가게(支店)라는 뜻으로서 65년전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장소를 비롯하여 중립국 감시위원회, 유엔사정전위원회, 판문각, 통일각, 자유의집, 평화의집 등 이 설치되자 구멍가게에서 일약 국제적 통일 협상 중재상들이 모이는 협상 장소로 확대되어 널빤지 책상을 배치해 놓고 서류에 서명을 한다.
판문점이란 이름을 기막히게 잘 지었다. 지난 4월 휴전협정일과 같은 날 27일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판문점 선언을 하고 만찬 등으로 56억이 들어 갔다고 하니 통일협상중재상과 무엇이 다르리!
이를 불식시키려 한다면 판문점의 가게 점자를 빼고 점찍을 점자로 바꿔 신문 기사 내용대로 세계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곳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하여튼 현지 지형을 살펴보지 못하고 외람되고 용렬하게 문헌상으로 기술하였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랄 뿐이외다.
 
3. 동파역과 도라산역
「여지도서」 장단 역원조에 동파역(東坡驛)이 장단부 진동면(津東面) 동파리에 있는데 장단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고 양주에서 서쪽 60리 지점에 있으며 종6품의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영서역(迎曙驛)에 속한 6개 속역중의 하나로 상등말 4필, 중등말 6필, 하등말 4필등 14필과 역졸 32명, 남종 15명, 여종 6명 등 노비 21명이 있다고 하였다.
동파리 거주민은 남자 219명, 여자 111명 등 총 330명 호수가 114호라고 하였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임진왜란 다음해 상주목사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에 의하면 동파역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굶주린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이튿날 보니 즐비하게 늘어져 죽어 있었다고 하였다.
도라산리는 장단부 중서면 관내에 있어 장단에서 남쪽으로 20리에 있고 면민은 남자 628명, 여자 570명, 총 1,198명에 호수 379호 중 도라산리 거주민은 남성 110명, 여성 125명 도합 235명에 호수가 69호라 하였다. 중종25년(1530)에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장단부 봉수조에 도라산 봉수대가 임진 남쪽 25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여지도서」상에는 장단 서쪽 15리에 있다고 하였다.
정조13년(1789)에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도라산리가 풍덕군 덕북면(德北面) 관내에 있고 면민이 남자 670명, 여자 317명 총 987명에 호수가 291호라고 하였다. 광무9년(1905) 서울 신의주간 경의선 철도가 준공되어 도라산역이 설치되었고 1913년 2월 풍덕군이 폐지되어 장단군 장단면 도라산리로 변경 되었으며 지금은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주민 미거주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되어있다.
끝으로 필자의 졸필을 보시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댓글을 올려 주시는 강호제현께서는 저의 참 스승이십니다.(明心寶鑑 正己篇, 道吾惡者 是吾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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