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메뉴

자유토론방
  1. home
  2. 커뮤니티
  3. 자유토론방
기사 확대기사 축소
게시물 내용
제목 동주최씨 무민공(武愍公) 최영장군 묘
작성자 송촌산인 작성일 2018-05-22 오후 3:53:56  (조회 : 208)
첨부파일
1. 최영장군묘 길라잡이
은평구 구파발에서 벽제관지(사적 제144호,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를 지나 국도 1호 통일로를 따라 파주쪽으로 가다보면 통일 휴게소를 통과 후 바로 필리핀 참전 기념비에서 멈춰 최영장군묘(경기도 기념물 제23호) 표지석 방향으로 우회하여 돌아가면 길 오른쪽에 관산 마을회관을 접하고 대자천 개울길을 따라 대자2동마을 끝에 도착하여 대자산(大慈山 203.2m) 옛 대자암 절터골로 산길을 따라 걸어서 500여m를 올라가면 최영장군(1316-1388. 12)의 묘에 이른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 벽제읍 대자리(현 덕양구 대양로 산70-2) 대자산 중턱 기슭에 최영장군 묘와 그의 선고(先考) 원직(元直) 묘가 위아래 계하(階下)로 모셔져 있다. 최영장군 묘는 앞에 있고 위쪽에 선고 묘가 자리하니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을 역임한 최원직(崔元直) 산소로 계하(階下)에 삼한 국대부인(三韓 國大夫人) 문화 류씨와 합장하여 정남향(子坐午向)으로 있다.
최영장군은 고려 제27대 충숙왕 3년(1316)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났다. 중종 25년(1530)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고양능묘조에 최영묘가 대자산에 있는데 지금도(142년이 지난)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다(至今 塚上不生草)고 하였으니 최영장군이 유언하기를 내 평생 욕심을 탐내지 않았다면 내 무덤위에 풀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로 전해져 붉은 무덤 적분(赤墳)이라 불러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적이 있었는데 그 후 후예들이 떼를 심어 잔디로 덮여있다.
가. 최부자 묘 표석
선친 묘는 장방형의 장대석위에 봉분을 조성한 방형분 형태로 자연석과 시멘트로 쌓아 곡담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는 젯상 상돌이 있고 그 오른쪽(묘에서 내려다 볼 때)에 묘표석(높이 96cm, 폭 66cm, 두께 27cm)을 우왕 12년(1386) 12월에 세워 ‘증 추충 아량 염검 보세 익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판문하부사 상호군겸 판예문춘추관사 동원부원군 최공묘(贈 推忠 雅亮 廉儉 輔世 翊贊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判門下府事 上護軍兼 判藝文春秋館事 東原府院君 崔公墓)’라 한자로 음각하였다.
최영장군 묘는 선친 묘와 같은 장방형 봉분으로 상돌 좌우에 신구표석이 있고 그 앞에 좌우로 문인석이 있으며 문인석 앞 좌우에 망주석을 1970년에 세웠다(조선왕릉에는 상돌 좌우에 망주석이 있고 그 앞에 문인석이 있음).
구 묘표석에는 ‘고려 진충분의 좌명안사공신 판밀직사 대장군 문하시중찬성사 6도도순찰사 철원부원군 시 무민 동주최공 휘 영지묘(高麗 盡忠奮義 佐命安社功臣 判密直事 大將軍 門下侍中贊成事 六道都巡察使 鐵原府院君 諡 武愍 東州崔公 諱 瑩之墓)’라고 음각하였다. 신 묘표석(높이 147cm, 폭 54cm, 두께 23cm)에 무민공 충혼비(武愍公 忠魂碑)라고 후예 최대명(崔大明)이 짓고 쓰고 김종권(金鐘權)이 찬하여 1970년 10월 3일 세웠다.
 
2. 최영장군의 요동정벌 좌절
우왕 14년(1388) 5월 7일 위화도에 도착 보름간 머물렀다가 5월 22일(乙未) 우군도통사 이성계(1335-1408)와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 ?-1390. 12)의 위화도에서 50,430명이 회군하는 쿠데타로 상관인 8도도통사 최영장군을 6월 3일 체포 고양으로 귀양보낼 때 54세의 이성계가 20살 차이나는 아버지뻘의 노령 73세 최영장군에게 ‘잘가시오 잘가시오(好去好去)’ 연거푸 말하고 서로 대하여 울고(?) 헤어진 후 그해 12월 개성 순군옥에서 참수하였다.
처형 됐다는 말을 들은 도성 사람들이 상점을 파하고 원근 사람들과 길거리의 아이들 및 골목의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눈물을 흘렸으며 시체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방치 되었어도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은 말에서 내렸다고 그 당시 간대부(諫大夫) 무송(현 전북 고창) 윤씨 윤소종(尹紹宗 1345-1393)이 기록으로 남겼다. 또다른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최영이 나이 16살 때 선친이 유언하기를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하여 이를 가슴속에 새겨 생활하니 집은 비좁고 의식은 검약하였다고 하였다.
 
3. 1396년 시호 무민(武愍)을 내려주다
태조 5년(1396)에 시호를 무민(武愍)으로 내려 시호법에 성품이 굽힘이 없이 꼿꼿한 것을 무(剛强直理曰武)라 하고 재앙과 세상을 어지럽혀 국가를 혼란 시킨 것을 민(禍亂方作曰愍, 在國逢難曰愍)이라 하였으니 최영장군의 품행과 역행한다.
조선초기에 약 100cm 크기의 화강석 묘표석의 머리글자에 고려를 쓰고 본관 동주(東州, 현 철원)앞에 시호를 무민(武愍)이라 표기하여 고려조에서 내려준 것처럼 되어 600여년 동안 인연을 멀리하고 은둔해 지켜온 것을 두꺼비가 덥석 파리 잡아먹듯이 1970년 후손이 약 150cm크기의 오석에 무민공 충혼비라고 시호를 머리글자로 써서 들어내 세웠으니 시호가 조상을 욕보이는 내용인 줄도 모르고 큰 자랑거리가 되는 양 시호의 뜻을 알고나 세웠는지 의문이 간다.
가. 시호의 뜻이 나빠 고쳐 달라고 상소한 사례
조선조 성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광산김씨 김국광(金國光 1415-1480, 66세)의 시호 정정(丁靖)을 고쳐 달라고 그의 아들이 상소를 올린 사례를 들어보자.
김국광은 세종 23년(1441) 과거에 급제하여 세조 13년(1467) 8월 함경북도 회령절제사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좌찬성겸병조판서에 승진되고 예종 때 우의정을 거쳐 성종 때 좌의정에 올라 광산부원군에 봉군되었다가 성종 11년(1480) 11월에 졸하니 시호를 정정(丁靖)이라고 내려 주었다.
시호법에 정정(丁靖)의 장정 정(丁)자는 뜻을 펴서 성취하지 못한 것을 정(述義不克曰丁)이라하고 정정의 편안할 정(靖)자는 공손하여 말수가 적을 것을 정(恭己鮮言曰靖)이라 하여 그의 큰아들 병조참의 김극뉵(金克뉵)이 선친의 품행에 맞지 않는다 하여 「성종실록」 성종12년(1481) 7월 28일(辛丑)을 시작으로 47회나 상소 및 상신 하였으나 끝끝내 시호를 고치지 못하였다.
충남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 소재 김국광 신도비<길이 231cm, 폭 91cm, 두께 26cm 성종20년(1489) 세웠다가 마멸로 영조2년(1726) 다시 세움>에 정정(丁靖) 시호를 게재하지 않았으며 축문에도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물며 고려 3대 명장인 동주최씨(東州崔氏) 후예 최대명씨가 1970년 세운 무민공 충혼비의 무민과 충혼이 결합하면 고려 정국을 어지럽혀 조선 건국에 충신이 되었다는 글이 되는 줄도 모르고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모르겠다.
만약 필자의 조상이었다면 강력하게 문중에 항의하거나 설득하여 철거하고 또 조선조때 내려준 시호를 정으로 마멸시키겠다.
나. 정몽주 조선조 사시(賜諡) 문충(文忠) 배제
영일(迎日, 현 포항) 정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 12-1392. 4, 56세) 선생의 부친 정운관(鄭云瓘)은 성균관 복응재생(成均館 服膺齋生)으로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에 추봉되고 어머니는 변한 국대부인(弁韓 國大夫人) 영천(永川) 이씨 사이에서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 12월 무자일(戊子)에 포항시 오천읍(烏川邑)에서 태어나 23세때 공민왕 9년(1360) 10월 정몽주외 2명이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 동지밀직사,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수문하시중에 이르렀다.
태종원년(1401) 11월 7일 영의정부사를 증직하고 태종5년(1405)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 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修文殿 大提學 監藝文春秋館事 益陽府院君)에 증직되고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내려주었다.
태종6년(1406) 3월 경기도 해풍군(현 개풍군)에 장사 지냈던 것을 용인 모현촌면(현 모현면 능원리 산3번지) 문수산(文秀山 221.1m) 자락 서북방향 진좌술향(辰坐戌向, 서쪽에서 북쪽으로 30도 방향)으로 이장하여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모현촌면은 원래 쇄포촌(灑布村) 이었던 것을 포은 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1호)를 이장한 후 어진 현인을 사모한다 하여 모현촌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숙종25년(1699)에 신도비(길이 236cm, 폭 90cm, 두께 40cm)를 세웠는데 조선조에서 내려준 벼슬과 시호를 배제하고 고려때의 벼슬 수문하시중 익양군 충의백 포은선생(守門下侍中 益陽君 忠義伯 圃隱先生)이라고 영의정 겸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관상감사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전서(篆書)로 썼다.
정몽주 암살범 조영규와 조영무 조선 개국공신이 되다
공양왕4년(1392) 3월 이성계의 5째아들 우부대언(右副代言) 이방원(李芳遠 1367. 5-1422. 5)이 이성계의 이복 아우 의안대군(義安大君) 양소공(襄昭公) 이화(和, 1348-1408. 10, 61세, 조선개국공신)의 사위 이제(濟)등과 함께 포은을 제거하여야 된다고 논의가 분분하더니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낙마했다고(사실 여부 확인 불가) 공양왕이 연이어 중사(中使)를 보내어 안부를 물을 때 포은은 이때 가서 문병을 하지 않고 4월 4일에 문병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방원의 문객 풍양조씨 조영규(趙英珪 ?-1395. 1. 9), 한양조씨 조영무(趙英茂 ?-1414, 묘소 광주시 퇴촌면 광동리 산8)등 네다섯명이 선죽교(善竹橋) 다리 위에서 쳐 죽이고 저자거리에 방(榜)을 붙여 머리를 효수하였다. 이때 이방원의 나이가 26세이고 포은과는 30년 차이이다.
이는 분명히 조영규등은 암살범인데 처형하지 못하고 어떻게 효수까지 하는가! 또한 조영규와 조영무는 조선조에서 개국공신에 봉하고 예조전서와 우의정까지 지낸 것을 보면 공양왕은 이성계 일파의 국정농단에 허수아비 왕이 되었고 포은 살해 후 3개월 13일이 지난 7월 17일 조선이 개국한 후 1년 5개월 지나 왕씨 왕족중 왕우(王瑀)와 왕승(王昇) 2가족만 살려 주고 유배자는 강화와 거제 바다에 몰살 시켰으며 그 외에는 색출하여 목 베었다<태조실록 태조3년(1394) 4월 15일 조 와 4월 20일 조>.
 
4. 지형도에 문화재 명칭 기재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하는 5만, 2만5천, 5천지형도 상에 문화재 명칭을 기재하고 있으나 간혹 누락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즉 2만5천 고양지형도 상에 고양벽제관지(사적 제144호, 고양 고양동), 최영장군묘(경기도 기념물 제23호 고양 대자리), 권율장군묘(경기도 기념물 제2호 양주 장흥면 석현리), 2만5천 능평 지형도의 정몽주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1호 용인 모현면 능원리), 오윤겸묘(경기도 기념물 제104호 모현면 오산리)가 누락된 사례를 찾아 내였기에 해당 관련 부서에서는 문화재 홍보 차원에서 새로 지정하는 문화재나 누락된 문화재를 발췌하여 해당기관에 통보, 산악인이나 문화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사료된다.
 
독자리뷰
독자 리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하단메뉴

가톨릭수호닷컴좌경종북언행고발개인정보 처리방침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