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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태종이 한양을 도읍지로 결정 했다니
작성자 송촌산인 작성일 2018-06-03 오후 6:14:53  (조회 :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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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6년 10월 29일(토) why? B3면 ‘김두규의 국운 풍수’칼럼에서 하륜이 극찬했던 천하길지에 자리잡은 이화여대 어쩌다가···제하에서 1404년 태종이 무악에 와보고 ‘도읍지가 들어설만 하다’라고 평하고 그 해 10월 ‘한양, 개경, 무악을 두고 동전점을 쳐서 한양으로 결정한다’고 기술한 것은 크나큰 오류를 범하였다.
 
1. 태조3년(1394) 9월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태조실록」태조3년(1394) 9월 9일(丙午)에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안동 권씨 문절공(文節公) 권중화(權仲和 1322-1408, 묘소 옛 경기도 장단군 서촌리), 개국공신 판삼사사(判三司事) 봉화백(奉化伯) 봉화정씨 문헌공(文憲公) 정도전(鄭道傳 1342-1398. 8. 26, 가묘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청성백(靑城伯) 공정공(恭靖公) 청송심씨 심덕부(沈德符 1328-1401, 묘소 옛 경기도 마전군 군내면 장양촌, 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낙안김씨 김주(金湊 ?-1404), 개국공신 좌복야(左僕射) 의령 남씨 강무공(剛武公) 남은(南誾 ?-1398. 8. 26, 묘 용인시 남사면 창리),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 성주이씨 경문공(景文公) 이직(李稷 1362-1431, 묘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등을 한양에 파견하여 종묘사직, 궁궐, 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이들은 현장을 답사한 후 말하기를 1104년 고려 숙종 때 지은 궁궐(고려사절요 숙종9년 5월 조)터가 너무 좁아서 남경(南京) 행궁터<연흥전延興殿, 인종4년(1126) 11월 임금이 남경에 행차하여 연흥전에서 군신에게 잔치를 베풀었고 2년후 인종6년(1128) 2월 궁궐에 불이 나고 고종 22년(1235) 2월에 궁궐을 새로 짓고 공민왕 9년(1360) 7월과 공양왕 2년(1390) 7월에 궁궐을 수리함, 고려사절요>에서 조금 남쪽으로 나온 곳에 해산(亥山)을 주산(主山, 도성의 주산을 백악이라고 하였음. 세종23년 8월27일조, 현 북악산)으로 하여 산줄기가 건방(乾方, 북서방향, 북쪽에서 서쪽으로 45도 방향)으로 내려와 건좌손향(乾坐巽向, 동남쪽, 동쪽에서 남쪽으로 45도 방향)으로 궁궐을 배치하여야 하나 정도전(鄭道傳)이 자고로 군자는 남면(南面)하여 정사를 살핀다(聖人南面而治天下「禮記」大傳편)는 고사를 인용, 주장하여 남경행궁과 똑같은 주산줄기의 중심 큰맥 기슭의 평지에 임좌병향(壬坐丙向, 남쪽에서 동쪽으로 15도 방향)으로 입수(入首)하여 경복궁 터를 잡았고 궁궐은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향)으로 정하였다(「세조실록」세조10년 9월 7일 조).
가. 경복궁 낙성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25일(辛卯)에 한양으로 천도하기로 정하고, 같은 해 12월 4일(己巳)에 공사를 착공하여 약 10개월 만인 태조 4년(1495) 9월 29일(庚申)에 종묘와 궁궐(경복궁)이 낙성된 것을 어떻게 10년이 지난 태종4년(1404) 10월에 한양을 도읍으로 결정했단 말인가! 단지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4년 10월 4일(壬申)에 태종이 무악에 이르러 중봉(中峰)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가히 도읍이 들어 앉을 만하다(可以邑居)”고 하였을 뿐이다.
2. 천하길지 이화여대가 아니고 연세대이다.
가. 연희궁(衍禧宮) 낙성
세종3년(1421) 태종이 상왕 때 무악(毋岳)은 명당이 되어 가히 도읍을 세울만 하다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진주하씨 하륜(河崙 1347-1416, 묘 경남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의 옛말을 생각하고 이궁(離宮)을 짓게 하니 지금의 서대문구 신촌동 연희궁(衍禧宮, 延禧가 아님)터이다(「세종실록」지리지 경도 한성부).
「세종실록」세종8년(1426) 9월 3일(癸巳)에 세종이 이곳에 있다가 같은해 10월 13일(癸酉)에 경복궁으로 돌아갔고 세조원년(1455)에 세조가 이 곳에서 농사형편을 살폈으며 「연산군일기」연산군11년(1505)에 다시 수축하고 이듬해 1월 27일(丁巳) 연회장으로 사용하였다가 이해 9월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호송관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심순경(沈順徑), 함경도 회령부사 최한홍(崔漢洪),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계종(柳繼宗), 장례원 판결사 이곤(李坤)등 4명의 호위<「중종실록」 중종원년 9월 7일(癸未)조>하에 강화 교동으로 유배 때 하룻밤을 이곳에서 묵고 출발하였다.
 
3. 무악산 형세
가. 백두대간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백두대간(白頭大幹 1,625.1km)이 함남 함흥에 이르러 불쑥 솟아 검문령이 되고 함남 안변군 신고산면(新高山面)과 강원도 회양군 하북면(下北面)경계를 이루는 철령(鐵嶺 685m)이 된다.
나. 한북정맥
백두산에서 2천여리를 뻗어내린 철령에서 서쪽으로 꺾어져 뻗어내려 한북정맥(漢北正脈. 223.6km)이 형성되어 5-6백리를 달리다가 철원군 근남면과 화천군 상서면 경계의 대성산(大成山 1,169.8m)에서 남서쪽으로 절골고개와 스피령고개를 넘어화천군 사내면과 철원군 서면 및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경계의 조경철천문대를 거쳐 광덕산(廣德山 1,043.6m)으로 뻗어와 화천군 사내면과 포천시 이동면 경계의 백운산(白雲山 903m)이 된다.
백운산에서 남쪽으로 도마치고개와 신로령고개를 넘어 가평군 북면과 포천시 이동면 경계의 국망봉(國望峰 1,168m)을 거쳐 가평군 하면과 포천시 일동면 경계의 청계산(淸溪山 849m)에서 서쪽으로 꺾여 원통산(圓通山 566m)에서 남쪽으로 뻗어 포천 화현면과 가평군 하면 경계의 운악산(雲嶽山 935m)에서 멈춘다. 운악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려 포천시 군내면과 화현면 경계의 수원산(水源山. 710m)을 거쳐 포천시 내촌면과 가산면 경계의 국사봉(國師峰. 547m)을 지나 큰 넉고개와 47번국도 진목터널 남쪽의 포천시 내촌면과 소흘읍 경계의 죽엽산(竹葉山.616m, 주섭산注葉山이라고도 함)을 거쳐 서쪽으로 머리를 돌리어 축석령(祝石嶺) 고개를 넘어 양주시 주내면의 불국산(佛國山 470m)으로 이어진다. 불국산에서 양주시 백석읍과 주내면 경계의 호명산(虎鳴山 423m), 한강봉(漢江峰 475m), 은봉산(隱鳳山 380.9m)에서 서북쪽으로 꺾어 이어지는 한북정맥이 된다.
다. 도봉지맥
한강봉에서 한줄기가 북서쪽으로 달리어 한북정맥<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지은 山經表>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줄기는 동남쪽으로 뻗어내려와 양주시 장흥면과 백석읍 경계의 챌봉(516m)에서 남쪽으로 뻗어 양주시 장흥면과 의정부시 호원동 경계의 사패산(賜牌山.549m)에서 의정부시 남쪽에서 갑자기 일어나 높게 솟은 석봉(石峰)인 의정부와 양주시 및 서울 경계에 도봉산(道峰山 721.3m)이 있다.
여기서 곤방(坤方, 남서쪽)으로 우이령과 육모정고개 및 깔딱고개를 넘어 북한산<北漢山 835.6m, 백운대(白雲臺)의 동쪽에 인수봉(仁壽峰 811.1m), 남쪽에 만경대(萬景臺, 800.6m, 國望峰이라고도 함)의 뾰족한 3봉우리가 구름속에 날아 움직일 듯 솟아나 3각을 이루어 삼각산 또는 화산(華山)이라고도 부른다.>의 만경대 남쪽으로 뻗어 동장대(東將臺 601.1m), 문수봉(文殊峰), 보현봉(普賢峰 722m)이 되고 돌출한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白岳山, 342m, 북악산이라고도 함)으로 이어지는 도봉지맥이 된다.
 
4. 연세대(연희궁터)가 명당이다.
북악산에서 서쪽으로 창의문 고개를 넘어 인왕산(仁王山 339.8m)으로 뻗어 내려 무악재고개를 넘어서 주산인 무악산(毋岳山 295.9m, 鞍山이라고도 함)에서 멈춘다. 무악산에서 남쪽으로 봉원사 뒷산으로 뻗어 내려서 연세대학교가 명당터이다.
무악산에서 서쪽으로 연희동 성원아파트로 뻗어내려 연희지하차도 삼거리 고개를 지나 안산 도시자연공원에서 궁동공원으로 이어져 백호가 되고 무악산에서 동쪽으로 금화터널을 지나는 줄기가 김교수의 주장대로 청룡이 이화여대 자리이다.
이러한 것으로 살펴볼 때 하륜이 극찬했던 천하길지에 자리잡은 이화여대가 아니고 연세대 자리임을 알 수 있는 것을 김교수는 경복궁을 관람도 하지 않았는지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니 선량한 독자들은 지식인으로 추앙받는 교수의 신분으로 설마 잘못 썼겠느냐고 철석같이 믿을 것이다.
끝으로 오탈자를 들쳐 내는 것이 개 눈에는 똥만 보이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황견흘육 백견당죄 黃犬䬣肉 白犬當罪)이며 제 눈 속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작은 티끌만 찾으려고 기를 쓴 흔적이 나타난 격(신약성서 마태복음 7, 3)이라 한다면 모든 책임은 필자의 탓(구제기求諸己,「논어」衛靈公)으로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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