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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6,1-15] † 민중 신학적 해방신학은 비성경적인 이단이다!(2)
복음일 2015-07-26 작성자 윤다니엘  (조회 : 2237)
2015726/주일복음말씀묵상/ (2-2) 민중 신학적 해방신학은 비성경적인 이단이다!<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과 유대인들의 오해! (요한6,1-15; 루카4,18-19)>
 
 
우리는 구원을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추상화하고 관념화시켜 생각하기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이 세상과 하늘을 구분하는 공간론적 이원론에 의거하여 구원을 하늘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구분하여 시간적 이원론에 의거하여, 구원은 오는 세상, 곧 내세에만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영혼과 육신을 가르는 존재론적 이원론에 의거하여서는, 구원이란 단지 영혼이 안녕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그래서 구원을 단지 육신이 죽은 후 하늘에 가서 또는 오는 세상인 내세에서 영혼의 안녕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구원이 너무 추상화되어 오로지 관념적으로 있는 것이지 경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가 가져온 구원은 그렇지 않다!
영생이란 신적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적 생명은 영혼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또 미래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지금 여기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에 완성될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다. 요한복음은 이를 특히 강조한다(6,24; 6,35-51).
 
우리는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실현한 구원을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 구원을 완전히 누릴 수 없다. 그러나 그 구원이 이미 시작된 만큼, 지금 여기서 우리는 그 구원을 첫 열매 형식으로 누릴 수 있다.
 
그 구원은 육신의 건강, 원만한 인간관계, 사회 정의와 평화,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등으로도 나타나고, 내면의 평화로도 나타나는 등,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의 도움으로 이미 하느님 나라의 백성, 곧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산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인 사랑의 이중 계명, 곧 하느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사랑과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삶을 하느님의 영의 도움으로 이미 지키며 산다는 뜻이다(마르12,28-34).
 
하느님의 영의 도움(갈라5,16-26)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사랑의 이중 계명의 요구로 다가오는 하느님의 통치를 실제로 받으며 살면, 인간관계의 갈등이 해소되고, 화평이 증진될 뿐만 아니라, 부가 비교적 공정하게 재분배되어 사회 정의가 일어나고, 사회 정의가 일어나면 사회 평화와 정치적 자유도 확대되고, 심지어 환경의 건강도 확보된다.

그러면 누구는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이 되는 일도 없고 누구는 너무 못 먹어서 죽어 가는 일도 없으려니와, 스트레스도 감소되어 개인의 건강까지 증진된다. 이와 같이 구원은 내세의 영혼의 안녕과 같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으로만 이해될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구원이 실현되었다고 강조한다. 구원은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연결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다만 이곳에서 누리는 구원은 종말에 완성될 구원의 첫 열매여서 그 경험이 완전하지 못할 뿐이다.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출애굽의 문자적 재현만을 절대적 구원개념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뜻이다. 신약 시대 열혈당은 구원을 출애굽 해방의 문자적 재현으로 생각했다.
오늘날 해방신학 신봉자들은 바로 그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야곱의 우물, 광야의 만나가 구원이 될 수 없다!
예수는 단지 다윗 왕조의 재건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출애굽식 혁명과 다윗 왕조 같은 정치체계의 건설로는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상대적으로 좀 더 많이 가져다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절대적 구원은 절대로 가져다 줄 수 없다!
 
지난주 마산가톨릭신문 칼럼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예수님은 세례 때에 성령을 받으셨다. 과연 하느님의 영이 그분 위에 내리시자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해 내보내며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말한다(루카 4,18-19).

파견받으셨음을 깨달으셨고 그 깨달음을 실천에 옮기시다 보니 십자가의 죽음을 면치 못하셨다. 따라서 교회가 가르치는 사회적 사랑을 외면하고 성령운동을 방언과 치유의 은사, 철야와 안수기도로 국한 시키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웰빙종교라고, ‘무늬만 신자라고 손가락질 당한다. 미국이 남미의 해방신학을 분쇄하려고 개신교 성령운동을 보급하여 남미 가톨릭에 커다란 피해를 입힌 음모를 교황청은 기억하고 있다.>(성염 요한 보스코 전 주 교황청 한국대사)
 
해방신학 신봉자의 비성경적 해석을 보라!
얼마나 왜곡되고 위험한 일인지!
왜냐하면 이분은 레위기 258-17, 21-24, 28, 39-41절의 희년을 문자적 재현만으로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년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된 은총의 신약시대를 뜻하며,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다!
루카4,21절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다. 희년의 나팔소리는 복음전파요, 복음전파는 우리의 해방의 선포, 곧 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선포이다.
 
희년에 관한 기본적인 사상은 하느님의 구속의 알림이다!
희년은 구속에 근거하므로 희년의 은나팔이 속죄일에 울리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주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61,1-2절을 읽으셨다. 은혜로운 해(the acceptable year)는 주님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가 그분께로 다시 돌아온 그분의 백성들을 받아들이셨던 해였다. 루카복음 4장에서 하신 희년의 선포가 루카복음 전체를 주관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신약시대 전체가 희년이다!
 
<파견받으셨음을 깨달으셨고 그 깨달음을 실천에 옮기시다 보니 십자가의 죽음을 면치 못하셨다.>
주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올바르게 이해하지도 못하고, 예수가 석가모니처럼 보리수 나무 밑에서 <‘사회적사랑(자비)>을 깨닫고, ‘사회개혁자로 사회’개혁을 주도하며, 그 이름도 거창한 사회적 사랑(?)을 하다가 붙잡혀 죽었다는 해석이다! 인본주의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알아도 바르게 아시라고 충고하고 싶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느님의 정하심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느님의 공의의 요구였다! 죄는 우리에게 있으나 하느님 자신이 그것을 처리하셔야 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2코린5,21; 사도2,23; 이사3,25; 신명21,23; 1요한4,10))!
그분이 사람이 되실 때 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의는 우리에게 돌려지지 않았다! 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분을 못박아 죽인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실은 하느님이셨다! 사람의 손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느님은 이 기회를 사용하여 사람의 죄를 드러내신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이단적 해석이 백주에 그것도 교회 안 각처에서 사회복지니, 사회정치학이니, 사회 사역이니, 희안한 신조어인 '사회적 사랑'이니, '사회'라는 단어를 붙여 놓고는 마음 놓고 자기들 멋대로 시도 때도 없이 광고매체마다 해방신학을 배우라고 나팔을 불고 있다니!
 
<교회가 가르치는 사회적 사랑을 외면하고 성령운동을 방언과 치유의 은사, 철야와 안수기도로 국한시키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웰빙종교라고,>
그러한 잘못된 면도 일부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러한 원인은 영적인 지도자가 교회안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히도 영적인 지도자가 오늘날 사라져 버렸다! 그러므로 이분은 해방신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령운동의 일부 잘못된 부분을 과장하고 있다!
오히려 이들로 인하여 오늘날 교회가 갈등하고 분열되고 있으며, 사회가 개탄하는 모습에서 해방신학이 하느님을 빙자한 인간적 투쟁일 뿐, 성령의 인도하심이 전혀 아님을 확신할 수 있겠다!  
 
<미국이 남미의 해방신학을 분쇄하려고 개신교 성령운동을 보급하여 남미 가톨릭에 커다란 피해를 입힌 음모를 교황청은 기억하고 있다.>
처음 듣는 소리며 참으로 칼럼의 글로서는 수준낮고 해괴망칙하며 충격적이다!
종북 좌파가 그처럼 반대하는 또 미국이 등장한다!
미국이 무엇이 부족해서 해방신학을 방해하려고 개신교를 동원했을까?
그것이 될 법이나 한 일인가?
당신은 이해가 되는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의 말씀을 올바르게 제대로 많이 읽고, 그 뜻을 정확하게 알자는 의미가 아닐까? 라는 한심한 생각이 들 뿐이다
교황청이 기억하고 있다면, 이제는 교황청이 해방신학의 본진이라는 말인가이 질문은 꼭 그 대답을 교황청의 책임있는 자로부터 듣고 싶은 대목이다!
왜냐하면 해방신학에 심취한 이분이, 수시로 그의 글에서 자신의 주장 그 배후에는 교황과 교황청 높은 나리들이 있다고 힘주어 은근히 자랑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도 해방신학에 빠진 이단들이 아닌지 참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

이들은 구약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 또는 모형론을 언제나 문자적 재현으로만 해석하는구약에 머물러 사는 말씀의 지식도 말씀의 지혜도 없는 자들이다!
특히 마산교구청은 가톨릭교회가 내년도를 ‘50th 희년의 해로 설정하였다고 크게 광고하고 있다. 잘 모르는 순진한 평신도를 대상으로, 가톨릭신문을 점령한 해방신학 이단들의 비성경적인 이단적 구호들과 성경말씀의 왜곡이 난무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사회혁명은 단지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에 자리바꿈만 가져오는 경우가 많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시민군들이 행진하면서 혁명을 외칠 때, 루이 16세 왕후가 시녀에게 혁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 시녀는 혁명이란 제가 왕후가 되고, 왕후께서 시녀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이런 자리바꿈은 억압과 착취라는 인간 본래적인 근본 구조를 바꿀 수가 없다. 20세기에 들어서 내내 기승을 부렸던 레닌의 사회주의 공산 혁명이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실증해 주고 있다. 인간의 투쟁만으로는 진정한 자유와 정의 실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이제는 자명한 사실이 된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창조주인 초월자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연결되어 그의 부요함을 힘입어 그의 온전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영생, 곧 신적인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같이 되는 것이다. 곧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얻어, 하느님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처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산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도, 비록 종말의 구원이 완성되기 전이라고 할지라도, 해방신학이 추구하는 것들인 자유, 정의, 평화를 구원의 현재화로 나타낼 수 있다!
 
구원이 진정한 구원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초월자 하느님에게서 와야만 한다!
오로지 신적인 것이어야지 인간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하지만, 실제로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자원을 동원하여 벌이는 투쟁으로 얻는 것도 결국 인간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피조물적 제한성을 띠므로 온전할 수 없고, 그러기에 이는 진정한 구원일 수 없다!
 
참 구원은 위에서 오는 하느님의 힘을 입을 때만 가능하다!
요한은 6장에서 예수의 이러한 메시지를 철학적 사고의 그리스적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원론적 사고 구조를 활용해서 선포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예수의 메시지를 그리스인들을 위해서 잘 번역해 주고 있다.
 
바오로도 요한과 똑같은 가르침을 준다!
갈라3,28-29절에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라고 말한다.
갈라3,28-29절은 위대한 선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의 영역에는 옛 창조의 갈등, 불의, 불평등, 억압과 착취를 조장하는 대표적인 구분들이 완전히 해소된다!
성적, 인종적, 가난과 빈곤에 따른 사회 신분적, 불의와 불평등의 옛 창조의 모든 것이 완전히 해소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화해와 자유와 정의 실현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인류의 위대한 구원자이시다!
구원이란 단지 구령(救靈)사업만도 아니고, ‘사회해방만도 아니다!
인권이란 하느님 나라의 구원의 현실화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인권을 무시하고, 여성을 억압하고, 하층계급을 착취하는 일이 세계 도처에 지금도 횡행하고 있다힌두 문명권과 모슬렘 문명권을 보라!
참된 인권 의식은 기독교 복음에서 유래하였다!
그러기에 기독교 역사에서 보듯이 복음이 올바르게 선포된 곳마다, 노예가 해방되고 여성들이 해방되며 약자들이 인권을 보호받는 일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한편으로는 교회의 올바른 복음 선포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현실화와 확대가,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한 복음의 왜곡과 제자도의 실패로 인한 죄악과 고난의 확대라는 양면을 가진 변증법적인 것이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사를 일방적으로 자랑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경과 교회사에서 우리가 분명히 배울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복음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하느님의 백성이 성령과 함께 성령으로 인하여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통치를 제대로 받아들인다면종말에 완성될 구원이 지금 여기서 이미 벌써 인권, 자유, 정의, 평화, 건강 등의 확대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권 의식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물로서, 기독교 문명이 가장 고귀하게 공헌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적으로 사고하고, 문명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 곧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만 출발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단지 미래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게 되고, 실제로는 유교적 사고에 빠지거나, 샤머니즘적인 영성을 추구하며 살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려는 열혈당의 투쟁처럼, 제주도 강정마을이나 밀양 송전탑이나 광화문앞 천막 안에서 해방가를 부르며, 아직도 철지난 사회주의 공산혁명으로 정의와 평화를 쟁취하겠다는 빗나간 종북 좌파들과 뒤섞여, 해방가를 부르며 핏발선 눈으로 어리석게 살아가다가, 허무하게 사라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물질적 부와 정치적 자유 등 현실적 구원만 추구하는 유대인들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가 영혼의 구원만 가르쳤다고 보는 이상한 성경해석도 잘못된 것이지만, 또한 하느님의 힘을 빌려 사용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 곧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어 하느님의 성령을 덧입는 것을 무시하고, 인간의 힘을 동원하여 인간 스스로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민중 신학적 해방신학은 비성경적이며 이단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올바르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선포하여 하느님의 백성에게 그 구원이 포괄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체험하도록 해야 하고,  온 세상이 그 구원의 덕을 입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

* 원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주일말씀묵상을 참고 하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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