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메뉴

커뮤니티 > 오늘의 복음
  1. home
  2. 커뮤니티
  3. 커뮤니티 > 오늘의 복음
기사 확대기사 축소
게시물 내용
제목 [갈라6,14] † 세상은 나에 대하여 이미 못 박혔다! (1)
복음일 2016-01-04 작성자 윤다니엘  (조회 : 1308)
 
(특집B-4) 그리스도의 몸의 회복을 위한 변증/ (4-1) 세상은 나에 대하여 이미 못 박혔다(갈라6,14).
   
 
< 이 글들은 가톨릭교회 내에서 해방신학에 물든 자칭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단적 교리에 대한 변증의 글이다! 당신의 신념이 세상 안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너무 무지한 소치이다. 경고하거니와 자칫 당신들의 변질된 인본주의 노선은 뱀의 후손의 노선과 동질의 것이다. 부디 하느님의 긍휼하심과 은총이 있기를!>
 
 
세상에서 분별되어 나와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첫째 원칙이다. 요한묵시록에서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얻었을 때, 요한은 실제적으로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두 극단의 세상을 보았다.
먼저 묵시17,3-5절에서 요한은 영 안에서 광야로 이끌려 바벨론, 곧 세상의 음녀와 모든 가증한 것의 어미를 보았다. 그리고 묵시21,10절에서 그는 동일한 성령에 이끌려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새 예루살렘, 곧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보았다. 이 대비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분명하다.
 
우리가 모세이든 발람이든 간에 만일 하느님께서 사물을 대하시는 그런 안목을 가지려면 반드시 요한과 같이 산꼭대기로 이끌려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평원에 남아 있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을 보지 못하거나 본다고 해도 무미건조한 교리만 깨달을 뿐이다.
 
광야에서 우리는 바벨론의 일을 볼 수 없을 뿐이며, 영적인 계시가 있어야만 하느님의 새 예루살렘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단 이것을 본다면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눈은 열려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눈이 열리는 체험을 하려면 반드시 일반적인 수준을 포기하고 산에 오를 준비를 해야만 한다.
 
음녀 바벨론은 항상 큰 성”(묵시16,19)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그것의 위대한 성취를 강조한다. 상대적으로 신부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묵시21,2, 10)으로 하느님께 분별됨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계신 그곳에서 오며 그녀의 남편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다. 이것은 우리 모든 믿는 이들이 체험할 일이다.
 
우리 안의 거룩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며, 온전히 그리스도께 분별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원칙은 근원이 하늘에 속한 것만이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 외에는 거룩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이 거룩한 원칙을 포기한다면 즉시 바벨론 안에 있게 된다.
 
요한이 묵시록에서 거룩한 성을 묘사할 때 첫 번째 언급한 특징은 성곽, 곧 벽이다! 성에는 하느님께서 출입하시는 문도 있지만, 요한은 먼저 성곽을 언급했다. 이것의 의미는 분별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첫째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만일 그분의 성이 그날에 그러한 분량과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면, 오늘날 우리는 반드시 사람의 마음 안에 그 성곽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반드시 하느님께 속한 모든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하며, 바벨론에 속한 모든 것을 거절하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 사이의 분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원칙상 우리와 세상과의 분별은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당시에 예루살렘의 성곽을 성공적으로 준공했지만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왜냐하면 사탄은 이러한 분별을 미워하며, 사람이 분별되어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와 그의 동역자들은 자신을 무장하여 한 면에서는 성곽, 곧 담을 쌓고 다른 한 면에서는 전쟁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거룩히 분별되고 잘 예비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에덴동산에는 원수를 밖에 가둘 사람이 만든 벽이 없었으므로 사탄이 들어올 수 있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그 동산을 지키기를 원하셨고(창세2,15), 그들이 사탄에 대하여 실제적인 보호벽을 만들기를 원하셨다! 하느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승리하신 사실로 말미암아 그분이 구속한 사람의 마음 안에 사탄이 결코 들어올 수 없는 에덴동산을 계획하셨다! 묵시21,27절에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의 교회에 대하여 특별한 계시를 얻었다는 것에 당신은 동의할 것이다. 마찬가지로세상(kosmos)”은 특별히 요한이 자주 사용한 단어로, 곧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성질에 대하여 특별한 깨달음을 요한에게 주신 것 같다. 1요한2,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아주 분명하게 하와가 받은 유혹을 반영하며(창세3,6), 요한은 이것을 사용하여 세상의 일을 설명하였다. 정욕이나 욕망 아래 포함된 모든 것과, 탐욕스런 야심을 일으키는 모든 것과, 우리를 교만케 하고 미혹하는 모든 것이 사탄의 체계의 일부분이다. 특히 우리 안에서 교만케 하고 미혹하는 모든 것은 세상적인 일이다!
 
출세, , 성공은 물론, 인간의 신념이나 주의(主義)적 정의 구현이니, 선한 행함과 같은 것도 세상에서 환영받는 것들이다. 특별히 그러한 것들이 종교로 포장되어 성경의 말씀을 그들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왜곡하는 지경에 이르면, 이것은 이미 하느님 앞에서 심각한 범죄에 속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의 출세와 성공과 심지어 정의와 선한 행함을 영광으로 삼는 것은 정당하게 보이지만, 요한 사도는 이러한 성공의 느낌을 가져오는 모든 것이 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공을 체험할 때마다 우리 안에 마땅히 이러한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이 성공에 내포된 죄악을 겸손하게 시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공할 때마다 세상의 체계를 어느 정도 만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성공에 대하여 자만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즉시 우리가 세상을 만졌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자신을 하느님의 심판 아래 두었음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온 세상이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러한 것을 알고 그러한 것이 필요한 사람임을 시인하는 사람은 보호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것을 알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조차도 너무나 쉽게 세상과 교만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영광이 돌아가지 않는 모든 것은 다 헛된 영광이다! 기이한 것은 보잘것없는 성공조차도 헛된 영광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교만을 만지고 세상을 만진다면, 우리와 하느님과의 교통은 즉시 단절된다. 악한 일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점점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일도 다 그분을 대적하는 세상체계의 일부분인 것이다.
 
심지어는 동기가 정당한 일의 성공으로 인해 생긴 만족까지도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킨 것은 이생의 교만이요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우리가 세상을 만졌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느님과의 교통을 유지하고 더럽혀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계속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백성을 파멸시키려고 마귀가 파 놓은 이 함정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세상을 도망갈 수도, 세상을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아주 가난한 시골에 내려가서 초가집을 짓고 그곳에 은거하며 세상을 피하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세상은 당신을 따라 그곳에 갈 것이다. 당신이 어디에 숨든지 세상을 당신을 뒤쫓아가서 당신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므로 금욕주의나 은둔생활이나 세상에 속한 초등 학문으로 세상의 체계를 벗어나기를 바랄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을 벗어나 구원을 받는 것은, 이것저것을 다 버리고 피하는 것도 아니요, 또는 그 반대로 세상에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맋시즘적 사회적 투쟁으로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 속한 방법으로 세상의 체계를 벗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안목을 가지고 세상은 죽음의 심판 아래 있음을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
 
 
 
 
 
 
 
 
 
 
목록
독자리뷰
독자 리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하단메뉴

가톨릭수호닷컴좌경종북언행고발개인정보 처리방침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