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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11,19-29]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복음일 2016-08-03 작성자 윤다니엘  (조회 : 213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11,19-29)
 
 
<소생(蘇生)과 부활(復活)은 다르다>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미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는지, 곧 그분께서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리셨는지를 계시한다! 그분은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었으며, 정확하게 말한다면 죽은 사람을 소생(蘇生)하게 하셨지만, 그분은 나는 죽은 자를 살린다.”고 말하지 않으시고, 대신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요한11,43-44절은 예수님은나자로야! 나오너라! 죽었던 그가 나왔는데, 손과 발은 천으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를 풀어주어 다니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요한11,43-44절은 소생하는 나자로를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는 죽음을 대면해야 하는 시간이 오고야 만다! 라자로의 무덤은 죽음의 썩어가는 깜깜한 절망의 자리에서 새롭게 생명이 소생하는 희망의 자리로 바뀐다. 이것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생과 부활은 다르다! 소생은 거의 다 죽은 사람이나 혹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야이로의 딸(마르5,35)과 나인의 과부의 아들(루카7,11)도 소생하였다! 소생한 사람은 소생 이전이나 이후가 같은 사람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경험했을 뿐 동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생(蘇生)일 뿐 부활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도 죽음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부활한 사람은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예수님께서 나자로를 소생시키신 까닭은 그가 사랑의 삶을 살아 당신의 부활에 참여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표적은 예수님 자신이 죽음 후에 부활하실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종말에 그를 믿는 자들을 그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을 가리키는 표적이기도하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우리는 헛된 기도들을 해왔을지도 모른다! 체험적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고 소생시켜 주시기를 기도했지만 주님은 치료와 소생 대신에 더욱 약해지는 것을 허락하신다! 결국 우리도 라자로처럼 죽고 장사되고 썩어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 그때가, 주님에게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바로 그 시간이다!
 
극도의 약함, 죽을 정도로 약해서 이제 나를 포기하려는 바로 그때, 주님은 돕는 분이 아닌 생명을 주는 분으로 나에게 오실 것이다! 당신은 이 표현이 이해되는가? 주님의 때는 우리와 다르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많은 것들이 주님의 지체하심으로 인하여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가 가기를 원치 않을 때, 그분은 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길을 좇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분 자신이 라자로의 부활이었다>
흔히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기도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런 저런 방법으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특별히 바라시는 것은 그분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 자신의 어떠함인데, 이는 그분의 하신 것은 그분의 존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타를 생각해 보자. 그녀는 주님의 능력을 믿었다. 그녀는 주님께 주여,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21). 마리아도 역시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주님 자신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의 어떠하심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하라!
 
히브11,6절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분이 누구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능력을 얻지 못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그분이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바로 생명이시라는 것, ‘그분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바로 부활이시라는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이 누구신지를 보게 하여 주시기를! 아멘.
 
23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그대의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11절의 말씀, 우리 친구 나자로가 잠들었습니다. 내가 가서 깨워야겠습니다.”라는 말씀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압니다.”(24)라고 대답한다. 곧 그녀는 전통적인 바리사이적 미래 희망이라는 의미로 부활을 이해한다.
 
주님은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마르타에게 그대는 이것을 믿습니까?”라고 물으셨다. 그녀는 , 주님, 나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었습니다.”라고 교리적 차원의 신앙고백처럼 대답했다. 이 말은 마르타의 믿음의 수준과 한계를 가리킨다.
 
마르타의 답변은 주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다! 동문서답식이다!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던 바리사이적 낡은 지식 때문에, 그녀는 가려져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의 낡은 지식과 낡은 생각으로는 사람이 주님의 새로운 계시를 알지 못하게 하는 가리개가 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나는이다.”라는 위대한 자기 선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진리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시라는(1,4) 점에서 자기를 믿는 사람에게 이미 지금 현실적이며 접근 가능한 것이라고 증언하신다(25-26).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은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해와 함께 우리는 영적인 일들에서 참된 성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 우리의 참된 성장은 이러한 영적인 실재를 붙잡는 것, 곧 우리가 하느님 자신의 인격을 아는가 아니면 하느님이 이루신 일들에 대한 지식만을 아는가? 모든 문제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장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자로를 살리셨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어떻게 나자로의 부활과 생명이 되셨는가에 관한 것이다! 당신은 여기에서의 차이를 보는가? 주님을 부활이시다! 그분은 부활이라는 어떤 것을 나자로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나자로의 부활이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하신 것은 외형일 뿐이고 본질은 그분 자신의 어떠하심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자로를 살리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주님이 바로 나자로의 부활이시며, 따라서 나자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였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모든 역사하심이 이 원리 안에 나타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만 한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그러한 것들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갖는다! 먼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다음에 소유하는 것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시는 분(Giver)과 그분의 은사들(His gifts)을 분리하여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주시는 분 자신이 곧 그분의 은사임을 깨달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많은 다양한 항목들을 하나씩 주시지 않는다! 그분이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어느 날 우리의 눈이 열려서 이것, 곧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여기서 주님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선포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 그분이 부활이시므로 나자로가 일어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자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믿는다. 그러나 그 강조점은 주님 자신을 얻는 것에 있었다! 나자로의 부활은 그렇게 중요한 현상이 아니며, 부활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커다란 의미가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명 주시는 분으로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을 생명으로 믿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분은 생명을 주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시다! 그분은 생명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생명이다. 또한 그분은 부활의 주이시며 부활 자체이기도 하시다! 우리는 이것을 접하는 즉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은 그리스도이다! 성모 마리아나 성인이나 천사들이 아니다!
 
주님이 모든 것이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적어도 한 줄기의 섬광이 우리 위에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신다! 부활과 생명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활과 생명을 아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교회의 정치꾼들>
요즘 소위 정치사제(해방신학 이단자들 등)들이 온통 사드문제에 몰입하는 것 같다. 성주에 <사드>를 설치한다는 정부의 결정에, 또다시 굶주린 맹수 마냥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신성한 미사예배를 무당들의 굿판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더욱 가관은 거의 대부분의 주교들까지도 해방신학에 물든 이단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맞서서 가톨릭 신자들이 이에 격렬히 대항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도 있다. 소위 종교지도자들의 가짜 권위 시대가 지나가고 그들이 위선과 무지와 천박스러운 진면목들이, 이제 시대를 이끄시는 그분의 빛 속에서 적나라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짜는 드러나고야 만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의 실패는 주님의 움직이심이다! 알렐루야! 이제 그들은 그동안의 행위와 태만과 오류에 대하여 어떤 종류이든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믿는 이들이 교회가 어떻게 하나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인간적인 방법을 통하여 합일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이 진실로 십자가를 체험하지 않는 한, 어떠한 방법도 유효하지 않다! 교회 안의 어떤 문제도 사람의 책략과 재간에 의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교회가 사람들의 기여와 사역을 필요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위에는 반드시 죽음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의 표가 따라 다니는 유용함을 부활이라고 한다! 주님 자신이 부활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의 교회를 얻기를 갈망하신다!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얻기 원한다면, 반드시 우리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앙망해야만 한다! 비록 우리가 많은 가르침들에 익숙할지라도 주님으로부터 기본적인 인치심, 곧 성령세례을 받지 않는다면 변화 받지 못할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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