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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 2천년 후 대한민국을 구할 메시아는 누구인가?

글 | 김원율 안드레아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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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루카 19, 41-44)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슬프게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를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병아리들을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루카 13,34) “오늘 너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하고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란 이름은 평화의 도성(都城)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진정한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듭되는 헤로데 왕가의 폭정에 말할 수 없이 시달렸고 대사제들과 바리사이 등, 사회적 지도층의 억압과 착취, 불의와 차별은 백성을 말할 수 없이 옥죄었습니다. 신명기의 정신과는 달리, 불의한 재판관의 예(루카 18, 2-4)에서 보듯 과부의 권리는 무시당하였으며 고아는 거리에 버려져 굶주렸습니다. 

사회의 하층민은 억압과 불공정에 시달렸고 이들의 분노와 원망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가 공정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공동체를 외쳤으나 (아모스 5,24) 예루살렘은 불의와 부정만이 넘쳐흘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들은 자릿세, 뒷돈을 성전경비대장과 대사제들에게 바쳐 좋은 자리를 차지하였고 서민들은 매번 과도한 부담의 속죄제물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성전을 정화하기 위하여 상인들을 내쫓은 사건이 그 유명한 성전정화사건이었고 이로 인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고난과 비참함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고대하게 되었고 이러한 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실 구세주로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세주가 그들에게 가져다줄 평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분노와 억압, 미움과 증오심으로 가득 찼던 그들은 오로지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메시아로서 외세인 로마군을 이 땅에서 몰아낼, 천군만마를 호령할 다윗의 후예를 원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파스카 축제 때에 풀어줄 죄인으로 누구를 선택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소리 높여 반란군의 우두머리 바라빠를 풀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실 때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소리 높여 통곡하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자녀들 때문에 울어라!”고 하시며 미래에 닥칠 예루살렘의 비극을 걱정하셨습니다. 

이제 눈을 우리에게로 돌려봅시다. 내년 3월이면 이 나라를 이끌고 갈 지도자를 선택해야 될 시간입니다.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라는 지위는 국민을 창의와 열정, 자유민주주의로 이끌어 미래에 불어 닥칠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의 쇠퇴와 멸망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국민을 재난지원금살포 등 명목으로 공짜심리의 마약에 취하게 하고 국민을 기득권층과 사회적 약자로 편가르기하며 질투심과 증오심으로 가득 차게 하여 마침내 베네수엘라같이 쇠퇴와 폭망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 민족이 분노와 증오심에 몰입되어 바라빠라는 거짓 메시아를 택한 결과 나라를 잃고 2천년간 나라없는 백성으로 떠돌았듯이 우리도 포퓰리즘과 공짜심리에 취해 거짓 메시아를 택함으로서 나라가 쇠망의 길로 들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2021.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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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1-11-1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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